이해해요 엄마

프롤로그

by 떼굴

딸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속이 뭉개지면서 화가 끓어오른다. 아무리 짜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으니 제자리 돌기를 한 것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딸을 마음 뒤편에 두고 엄마를 소환한다. 나는 어떤 딸이었나. 생각 줄기가 돌기처럼 일어나 실체를 드러낸다. 갑자기 딸 행동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서운했던 마음이 슬그머니 미안함으로 바뀐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노화의 시계로 진입한 모양이다. 살아 내느라 발버둥 쳤던 젊은 날은 어쩌면 더 나은 노년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변하는 시대에 맞춰 나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면서 전환을 반복해 온 긴 시간들. 인생의 과정은 시끄럽지만 끝은 다 같이 고요히 마무리한다. 고요한 마무리. 마지못해 고요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침잠에 드는, 미련 한 톨 남김없이 떠날 수 있는 궁극의 마무리를 원한다.


20대 이전엔, 친정 엄마가 성 역할의 모델 일 수밖에 없다. 내게 친정엄마는 닮겠다는 의지보다 나는 저러지 않겠다는 다짐의 모델이었다. 엄마를 기준으로 더 높은 자존감으로 살았다고 믿었던 젊은 날을 보내고 나니 엄마보다 품위 있게 늙고 싶었다.


중년으로 진입한 시계의 어느 날, 나에 대한 딸의 부정을 알게 되었다. 자기 눈에 비친 단편을 전체로 확대시킨 딸처럼 나 역시 친정 엄마의 일부를 그렇게 저장하고 단정했다. 그랬는데, 딸의 부정을 경험한 후로 엄마를 향한 내 기억이 왜곡의 극히 일부 이거나 사실과 먼 오류일 수 있다는 자각과 만났다.


엄마와 이별할 시간이 다가온다. 엄마와 영 이별 전에 내 기억 속 숨바꼭질을 끝내고 싶다. 술래가 된 나는 내밀한 곳에 숨겨졌을 엄마에 향한 왜곡을 찾아낼 것이다. 무의식에 갇혀 굽어진 왜곡을 꺼내 이해 다리미로 진실로 반듯하게 편 뒤 천국문 앞에서 엄마를 배웅하고 싶다.


시작은 아직 대기한 서운함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지 모른다. 온전한 이해가 과연 가능한가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말 의미가 엄마 전부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가능에 무게를 싣기로 했다. 내 안에는 엄마로 체화된 여러 모습의 내가 있다. 그러므로 이미 엄마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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