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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또 오르면(2)

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성심원-운리

by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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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리까지 이어지는 임도

실속 없는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이제는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황량하고 넓은 시멘트길을 한참 동안 내려갔다. 이게 임도라는데 임도도 임도 나름이다. 어떤 임도는 흙길이고 나무가 우거진 길도 있는데 여기는 그냥... 이렇다. 주변에 나무는 없고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물론 중간에 흙길도 좀 있지만 대부분이 시멘트길이다. 그리고 그늘이 정말 없다. 누가 등 떠밀어 온 것도 아니므로 투덜대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 구간은 나도 모르게 구시렁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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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을 돌리면 멋진 경치가 보여서 투덜거림을 잊는다.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것이 청계저수지란다. 제법 규모가 큰 저수지다. 그리고 길을 걷다 보면 아직 녹지 않은 눈도 보게 된다. 해를 등진 산비탈이라 그런지 아직도 간간히 눈이 보인다. 3월에도 눈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긴 설악산이나 한라산에 정상 부근에서는 4, 5월에도 눈을 볼 수 있다고 하니까 지금 여기서 눈을 보는 게 아주 신기한 일은 아닐 듯싶다. 눈을 보니까 갑자기 설빙이 먹고 싶다. 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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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임도 구간

좀 지루하다 싶으면 눈구경도 하고 또 좀 지루하다 싶으면 멀리 전망도 본다. 그래도 길은 하염없이 이어져서 지친다. 지치면 땅바닥에 털푸덕 앉는다. 여기는 중간에 마을이 없다. 마을이 없으니 정자도 없고 의자도 없다. 걸터앉기 좋은 바위조차 없다. 그냥 길바닥에 퍼질러 앉는 수밖에 없다. 지나는 차도 없고 지나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쉬다가 걷다가 내려오다 보면 산그늘이 조금씩 진다. 육지(?)에 거의 다 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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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촌마을과 오솔길

드디어 점촌마을이다. 여기까지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웅석봉헬기장에서 여기까지 6.4킬로인데 길은 정말 단순하고 길다. 오르막 2.5킬로가 2시간 반 걸린 것과 내리막 6.4킬로가 3시간 걸린 것을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역시 걷기의 난이도는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도가 중요한 것이었다.

출발지인 성심원 혹은 어천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정말 마을이 없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이렇게 긴 구간 마을을 거치지 않는 길은 처음이다. 하지만 점촌마을 후로는 탑동마을이 멀지 않고 운리도 가까이 있다. 중간에 아주 잠깐 숲길을 지난다. 하지만 이내 시멘트길로 이어진다.




IMG_7010.JPG 정당매

점촌마을을 지나 30분 정도 가면 탑동마을이다. 여기서 정당매라는 매화나무를 보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 중 하나다. 무려 수령이 640년이나 된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4년에 정당매는 고사했단다. 대신 그 가지 일부를 접목하여 번식시켜 옆에 식재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정당매는 나무 모양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작년에 고사했다니 안타깝다.





IMG_7015.JPG 단속사지터와 석탑

마을 한가운데 뜬금없이 탑들이 서 있다. 알고 보니 단속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이란다. 단속사지 삼층석탑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옛날에 역사공부할 때 들었던 거 같다. 검색해 보니까 단속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고 조선 초기까지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글자를 새긴 돌이 있었다고 하고, 고려시대 강회백이라는 사람이 심은 매화가 아까 본 정당매라고 한다. 알고 보니 굉장히 오래된 유서 깊은 절이었다. 이런 절터와 탑들이 마을 한가운데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니, 절터가 있던 자리에 마을이 생긴 것이겠지?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저절로 알겠다.





IMG_7020.JPG 남명선생시비

그리고 여기 또 오래된 시를 읽어볼 수 있는 시비가 있다. 남명 선생이 사명당에게 준 시라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과 비교될 만큼 유명한 학자였다. 당시 조선의 정치를 비판하고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며 벼슬에 뜻이 없어 수차례 벼슬을 거부하고 말년에는 지리산에 은거했다고 한다. 나는 퇴계 이황을 비롯한 당시 정치 주류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는 점에서 남명 조식 선생을 매력적인 인물로 생각해 왔는데 여기서 그 시비를 보니 너무 반갑다. 지리산둘레길은 역시 마을을 지나고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지금까지의 힘들어서 투덜대었던 것이 일순간에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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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리마을과 택시 정보

운리마을은 탑동, 본동, 원정 등 3개의 동네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단다. 운리마을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여기에 택시번호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어떤 안내문은 비용까지 친절하게 적혀있다. 참고로 2015년도 촬영이니까 지금은 비용이 달라졌을 것 같다.



지리산둘레길 7코스인 성심원-운리 구간은 웅석봉 오르막 구간으로 악명이 높은 코스다. 역주행을 하더라도 그 길을 내려온다면 도가니가 나갈 것 같다. 힘들더라도 오르막에서 힘든 게 나으므로 가급적 역주행은 하지 말자. 그런데 전체적으로 오르막의 힘듦보다 내리막의 지루함이 더 문제다. 꽃이 핀 늦봄이나 낙엽이 지기 전 늦가을에 걷기를 권한다.

나는 걸으면서 힘들었던 것이 탑동마을에서 싹 풀렸다. 사람마다 자신의 힐링 포인트를 찾으면서 걸으면 이 구간도 걸을만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걸었던 구간들이 제각각 특성이 다른 것이 재미있다. 다음 구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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