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다음날 새벽 5시 30분, 화엄사 입구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일정이 가능한 것은 화엄사 관광지구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이다. 살짝 머리를 굴려서 이곳에 숙소를 정했기 때문에 어제의 걷기를 여기서 마칠 수 있었고 새벽에 일어나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잔머리를 너무 잘 굴렸다.
화엄사 관광지구 주차장에서 둘레길이 잠시 헛갈릴 수 있다. 주차장 앞까지는 벅수가 보이는데 주차장 안에서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주차장을 통과하여 길을 건너 토박이 가든 식당과 지리각 식당 사이로 난 길로 가면 된다. 100미터 정도 걸어가서 월등파크호텔을 끼고 우회전해서 산길 쪽으로 접어든다. 이 길을 세 번을 걸었지만 매번 이 복잡한 구간의 사진은 찍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시끌벅적한 관광지구를 벗어나면 한동안 숲길과 임도를 걷게 된다. 그런데 새벽에 숲길을 걸으면 어려운 점이 하나 있다. 밤 사이에 거미들이 엄청나게 거미줄을 쳐놔서 그걸 헤치면서 걸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뻥을 좀 보태면 자칫하면 거미줄을 온몸에 휘감아서 미라처럼 될 수 있다. 만약 맞은편에서 둘레꾼이나 마을 분이 지나게 되면 속으로 만세를 부른다. 그분이 거미줄을 헤치면서 왔을 테니까. 그래서 더욱 반갑게 인사하게 된다. 어쩌면 그분도 마찬가지 마음일 수 있다.
물을 다스리는 것이 농사를 짓는 데에는 매우 중요하다. 임도를 따라서 길게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소중한 물길이다. 어떤 구간은 수로가 내 키보다 높게 뻗어있다. 되게 오래전에 만들어진 물길이다. 약간 묘한 기분이 드는 길이다. 임도와 숲 속 오솔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길은 당촌마을을 지나 수한마을로 향한다.
수로가 이어진 임도에서 벗어나 숲길을 잠시 걷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을이 나타난다. 오솔길을 벗어나는 지점에 아주 독특한 집을 만나게 된다. 항아리로 만든 탑, 얼룩말 인형, 물레방아 등으로 장식된 집이다. 2015년에 걸었을 때는 입구에 조각한 장승 모양이 좀 특이하다 싶었는데 이번에 걷다 보니까 정원과 집 전체가 눈에 확 띈다. 정말 개성 넘치는 집이다.
둘레길은 수한마을을 가로질러 이어진다. 마을회관과 당산나무 앞을 지나간다. 500년이 넘은 당산나무는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위용이 당당한 나무다. 이 당산나무에 잎이 일시에 피게 되면 풍년이 들고 몇 번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온단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하얀 개가 따라왔다. 낯선 사람인데도 짖지도 않고 길을 안내하듯이 꼬리까지 살살 흔든다. 사진을 찍는 내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더니 당산나무 앞에서 훌쩍 가버렸다. 이제 이 마을의 명물인 당산나무를 봤으니 가던 길을 가보라는 듯이.
수한마을을 벗어나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간다. 한동안 계속 아스팔트길이다. 포장된 길이라 걷기는 별로 좋지 않지만 양쪽으로 푸른 논이 펼쳐져서 풍경은 보기 좋다. 이제 막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아직 새벽이슬을 머금고 있는 벼들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이 시간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역시 일찍 일어나서 나오길 잘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큰 도로를 건넌다. 길가에 식당도 있다. 큰길을 건너 방광마을로 향한다. 방광마을에도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다. '방광'이라는 이름이 재밌어서 유래가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얘기가 너무 긴데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스님이 남의 밭에 곡식이 잘 익어서 세 알을 주인 몰래 가져왔다. 그 벌로 소가 되어 3년 동안 그 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3년 후 소가 똥을 싸는 게 거기에 빛이 나면서 무슨 경고를 해 주어서 밭주인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소가 싼 똥에서 빛이 났다고 해서 '방광'이라고 했단다. 이름의 유래로는 너무 직관적이지만 아주 재밌는 전설이다.
오미-방광 구간은 그 유명한 화엄사 입구를 지나고 구례읍을 지척에 두고 있어서 접근성이 좋은 코스다. 세 번을 걸었지만 걸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계절도 달라지고 주변 풍경과 여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봄이나 가을에 걷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한여름에 걷게 된다면 이른 새벽이나 늦은 오후에 걷기를 권하고 싶다. 기왕이면 이른 새벽이 더 좋은 것 같다. 아, 그리고 태양을 피하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약간의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한다. 커다란 우산을 펼쳐서 등산배낭에 꽂고 걷는 것이다.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햇볕 구간을 피하기 어려울 때는 골프우산을 등산배낭에 꽂고 걸었다. 뭐 스타일을 좀 구기면 어떠랴. 한여름에는 조금이라도 태양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