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트레킹 7편
이제는 밀림 같은 느낌의 숲지대를 벗어나 다시 황량한 길을 걷는다. 신기하게도 만년설이 흐르는 계곡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계곡이 따라온다고?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곡을 끼고 길을 만든 것이겠지. 하지만 '계곡이 따라온다.'라고 표현하니까 뭐랄까, 계곡이 내 길동무가 된 것 같아서 낭만적인 느낌이 든다. 이 길을 따라 다음 목적지인 '히말라야'로 간다. 트레킹 도중에는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히말라야 속의 '히말라야'.
아래쪽에는 계곡이 흐르고 멀리 푸른색 지붕이 보이는 곳이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엄밀히 말하면 마을이라기보다는 롯지들이 몇 채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에서 점심밥을 먹는데 볶음밥을 시켰더니 커다란 접시에 머슴밥처럼 쌓아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너무 많아서 다 못 먹었을 것이지만 워낙 힘들어서 그런가? 먹다 보니 다 먹었다. 그런데 반대편에 앉아있던 한국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어머, 저거봐. 저 아가씨 저걸 혼자 다 먹었어."
"와.. 양이 엄청나던데 잘 먹네..."
음... 아가씨라고 칭해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내용이 좀 그렇다. 평소 같으면 다 못먹는건데, 뭐 해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거지만... 어쨌든지간에 그만큼 체력소모가 많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정말 속상한 것은 한국에 와서 몸무게를 재었지만 그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트레킹 기간 동안 잘 먹어서 그런가 보다.
'히말라야'에서 출발하면 황량한 경치가 계속 이어진다. 멀리 폭포가 언 것도 보이고, 고산지대 식물들도 보인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얘들도 춥고 산소가 희박한 환경에서 살기 위해 나름 진화한 것 아닐까? 지금 보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진화의 산물이고 그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인간도 그러한 생명체 중 하나일 것이다.
경치가 바뀌니까 마음도 덩달아 쓸쓸해진다. 황량한 들판 같은 길을 한동안 걷게 되는데 우연히도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벌판에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전에 미국 여행에서 어마어마하게 황량한 지역을 운전해 지나갈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냥 갑자기 뚝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기분,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일부러 나를 그곳에 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누군가가 신일까? 나 자신일까?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황량한 들판을 지나 다시금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르막의 코너를 돌아서자 아주 멀리 마을이 하나 보인다. 아까 '히말라야' 마을처럼 파란색 지붕이 보인다. 오늘 묵을 '데우랄리'라는 곳이라고 한다. 마안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풍경이 변했다. 바로 눈사태란다. 허걱. 너무 놀라서 심장이 콩당콩당거린다. '데우랄리'는 눈사태를 비켜간 안전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다.
아까 점심 먹을 때, 마안이 이제부터 가는 구간은 눈사태가 위험하기 때문에 점심 이후에 걸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데우랄리'에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구간은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햇살이 강한 오후에는 지나가지 않는 것이 좋단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데우랄리'에서 잘 거라고 했다. 다소 이른 시간에 오늘의 걷기를 마무리하게 되지만 그게 안전할 것 같다고 했다. 따라서 내가 지금 매우 느리게 걷는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설명을 들을 때는 내가 느리게 걷는 것에 신경쓸까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사태를 목격하고 나니까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왜 가이드가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마안은 노련한 가이드였다.
앗... 갑자기 걱정되는 사람들이 있다. '밤부'에서 보았던 한국 교회에서 온 단체 일행들. 그들은 내가 '히말라야'에서 밥을 먹기 시작할 때 이미 출발하는 중이었고 지금쯤이면 '데우랄리'를 지나 저 눈사태 난 지역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초등학생도 있는데... 가슴이 더욱 콩당콩당 뛴다. 여기가 히말라야 산 속이라는 사실이 정말 실감이 난다.
이제는 멋진 풍경도 마냥 멋있기만 하지는 않다. 저 뒤로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있는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설산의 거대한 모습이 연상되면서 자연의 힘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늘 산에 오를 때 초입에서 속으로 산신령님께 기도한다.
'제가 이 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무사히 다녀오게 해 주세요. 정말 느리게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조심스럽게 비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는 지금까지 갔던 그 어떤 곳보다 더 거대한 산이 아닌가? 거대한 산맥. 문득 내가 트레킹을 시작할 때 기도했던 것을 히말라야의 산신이 알아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말로 기도했는데...
'데우랄리'를 향해 걷는데 옆으로 헬기가 지나갔다. 부상자가 있다는 말이다. '데우랄리'에 막 도착하니까 마침 헬기가 출발하고 있었다. 아... 어쩌나... 아까 그 단체 사람들이면... 아이가 다쳤으면... 마안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누군가 다쳤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모르겠단다. 다만 동양인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만 들었단다. 한국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누군가가 다쳤다니 안타깝다. 눈사태가 무서운 거구나. 부디 심각한 부상은 아니기를 기원해 본다.
'데우랄리'에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모처럼 밀린 빨래를 해서 널었다. 이렇게 느긋한 오후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덕분에 저녁 식탁에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수다도 떨고 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한국말과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여 좀 정신이 없었지만...
거기서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한국의 정치상황을 화제로 꺼냈다. 그리고 박XX 대통령(난 그 이름조차 입에 담기 싫다)에 대한 의견을 묻길래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으로, 나는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국가를 자신의 사유물로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더 설명하고 싶었지만 영어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어떻게 저런 이력의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였다. 뭐 하긴...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데우랄리의 밤은 그렇게 답답한 가운데 깊어져갔다.
'데우랄리'의 공용식당 천장에 커다란 한국 볼펜이 매달려있다. 정말 뜬금없는 장소의 공부왕볼펜! 누가 왜 이렇게 큰 볼펜을 짐으로 싸들고 왔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저것을 걸어두고 갔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