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기획자에게 행보라는 단어 자체가 거창해보이지만, 덕분에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만으로 9.5년이 지나가는 시점, 지금까지의 10년과 앞으로의 10년에 대해 생각합니다.
저의 꿈은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의 전문가가 될 지, 어떤 전문가가 될지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전 '전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 굉장히 정통하고, 모두가 의견을 물어보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견이 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직업들을 꿈꿨었습니다. 막연히 방송작가, PD, 기자 등을 꿈꿨었고 중학생때부터 기회가 오면 닥치는대로 도전을 했었습니다. 중학생때 경험해본 방송작가도 스무살 새내기에 도전한 뮤직비디오 프로덕션 연출부도 SKT 인턴십도 다 빨리 전문가가 되기 위해 분야를 찾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막연하게 '기획'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분야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전문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조건을 고민했었습니다. 학력이 높은 것이 전문가일까 아니면 업무경험치가 높은 것이 전문가일까, 항상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다행히 이 고민은 대학생 때 10개월간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했던 무역포워딩회사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생각없이 하는 일'은 시간이 쌓인다고 업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 알바생같은 단기 계약직인 저를 담당했던 공채 신입사원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영학'을 복수전공하라고 충고를 해주었죠. 경영학이 취업에도 중요하지만 회사생활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프로모션 프로젝트로 대상을 탔던 SKT 인턴십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전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게 되었죠. 그리고 전문가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준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경영학과에서 많은 수업들은 대부분 교재를 기반으로 한 수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업에서 임원을 하고 계시다가 겸임교수로 오신 박찬원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죠. 요즘은 퇴직 후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멋진 분입니다. 교수님은 전혀 모르시겠지만 저는 그 분의 수업에서 전문가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요즘 소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고 하죠? 교수님들의 아리까리한 이야기와 다르게 실전에서 나오는 현실감각 넘치는 이야기에서 진짜 전문가는 현장에서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획 전문가가 되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여러 어려움 끝에 UX라는 마법에 이끌려 지금의 직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는 항상 '이론을 실전으로 녹여내는 전문가가 되자'라는 말을 되뇌였죠.
저의 이커머스 기획 10년은 기반이 되었습니다.
인턴을 마치고 정식 입사가 확정됐을 때 책을 2권 샀습니다. '린치핀'이라는 책과 '출근첫날, 3년차처럼 일하라'라는 책이었죠.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제목들만은 강렬하게 머리 속에 남아있습니다. 대기업이라는 정글에서 현장감각있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린치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린치핀'이란 '대체 불가능한 인재'라는 것이었죠.
회사라는 진짜 현장에서 배울 것은 산더미였습니다. 여기저기 글이나 강의에서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특히나 이 직무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현장에서 치고 박고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은 곳이었고 전 정말 많은 선배들과 상황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신입 처음에는 저같은 지각쟁이가 무려 7시반에 출근해서 정책서와 SB를 읽어가며 일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도 있었고,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건지 저는 전체 모듈을 돌면서 이커머스 조직 전반에서 분담하여 일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또 개선하고 구축하는 업무들을 하면서 돈과 데이터 흐름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영상에서도 말했었지만, 이커머스의 역사를 공부하고 미래전략팀에서 이커머스 시장의 흐름과 온라인 비즈니스에 대해서 파악하고, 최근의 정말 고도로 복잡한 온오프라인 연동의 이커머스를 구축하기까지, 쉴새없이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전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 이 업계에 있어도 저만큼 많은 기회와 많은 분야를 다뤄보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깊이없이 보이는 것만 고치는 정도로 일을 맡은 것도 아니고요. 리뉴얼 개선과 오프라인을 기반한 몰을 기획한다는 것은 전체의 구조와 정책을 모두 알아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복잡함과 제약이 많은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에 많은 공부가 되었죠.
항상 인풋과 아웃풋이 동시에 발생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내가 노력만 하면 인풋이 늘어날 수 있기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스스로 성장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걸어다니는 정책서'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서비스의 앞뒤좌우 모두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렸죠.
오히려 린치핀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린치핀이 된다는 것은, 회사에서 '나만 잘났다'라는 생각이 중심이지 않나 싶어요. 그간 동일한 회사에서 여러 선배들과 후배들의 움직임, 그리고 업무와 팀의 무수한 변화속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진짜 전문가는 '린치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올바른 생각과 지식을 퍼뜨려서 모두를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도 누구의 선배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공부한 생각과 제가 한 고민들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생각들은 브런치의 글과 외부 활동을 통해서 점점 더 강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관종이라기엔 누군가의 평가를 무서워하는 소심함도 크고, 여전히 이론과 현장을 더 공부해야하는 우물안 개구리일 수 있지만 '전문가'가 되려면 '지식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여 왔습니다. 그런 결과물 중 하나가 직무 10년차의 노하우가 정리된 제 첫 책인 '현업 기획자 도그냥이 알려주는 서비스기획스쿨'인 것이죠.
10년간 감사한 점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커머스라는 도메인에서 여러가지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건 넓은 업무 스펙트럼 때문이고 이렇게 업무를 주신 분들께도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움직이는 일을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정보가 쉽게 닿을 수 있는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원하는 정보나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얼마든지 찾아보고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대외활동을 통해서 점점 더 많은 '진짜 전문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더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10년간의 사회활동에서 '전문가가 아닌 전문가'들도 무수히 보았습니다. 겉은 뻔지르르하고 '4차산업혁명'을 논하지만 사실은 게시판하나도 실제 만들고 운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대기업에서 억단위로 돈을 받아서 자문을 해주지만 사실은 구글링한 내용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만 해주고 가는 컨설팅업체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할수록 현장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고, 이런 현장에서 업무와 도메인을 고민할 수 있도록 연습해온 제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나는 회사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과 배움의 시간을 바탕으로 진짜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전체 큰 그림을 보고 진행하는 프로세스 기획
이커머스 도메인에 대한 현장과 시스템, 그리고 트렌드 지식을 바탕으로한 분석력
후배 기획자를 성장 시키는 교육 역량
제가 일했던 이커머스는 굉장히 큰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롯데ON'의 경우는 오프라인 계열사 5개의 오프라인 매장 레거시와도 연결되어 있는 굉장히 복잡한 서비스입니다. 과거 롯데닷컴이나 엘롯데 단일 구축한 경험으로 비교시 정말 말 그대로 7개급의 사이즈였습니다. 물론 이런 사이즈의 사이트는 대기업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구조죠. 이 시스템은 이 온오프라인에 종사하고 있는 수천명의 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마트나 백화점 하나의 지점에서 일하는 사람들만해도 10명정도부터 수백명인데, 전국 지점의 수는 수백개에 달하죠. 입점사의 범주까지 하면 정말 큰 영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쿠팡이나 네이버와 같이 거래규모가 큰 곳도 온라인만 담당하지만 롯데는 오프라인 레거시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작은 변화에도 복잡도가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이런 큰 그림은 보고 움직이거나 디테일한 연동구조는 사실 소규모로 시작하는 이커머스에서는 그닥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곳들은 외부 솔루션들을 통해서 적은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저의 업무적 경험이 쓰일만한 곳은 '이제 막 자체적으로 결제 이후 시스템을 붙이도록 성장하는 곳'이거나 ' 이미 크게 성장한 곳'에서 의미있는 지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비스기획자'가 여러가지 프로덕트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새로운 환경에서 얻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저는 업무 방식의 전문가가 되기 보다는 특정한 도메인을 바탕으로한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업무 방식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어쩐지 굉장히 공허합니다. 실체가 없으니까요. 전 현장을 바탕으로 한 전문가가 되기를 바래왔고, 조금씩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커머스라는 분야에 대한 도메인 지식은 트렌드를 분석하는 역량과 함께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커머스판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저만의 생각과 분별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커머스의 역사를 쉽게 푸는 강의를 준비하거나 무료배송 트렌드에 대해서 고민한 아래의 글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 전 후배 기획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큰 회사와 작은 스타트업의 가장 큰 차이는 조직이 시스템적으로 돌아가느냐입니다. 작은 스타트업에서 중요 역할을 하던 인물이 퇴사를 해서 업무가 휘청거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인적 자원의 개인기에 의존한다는 말인데요. 회사가 커지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개인의 역량이 아닌 시스템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즉, 한명이 휴가를 가도 대체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많이 확보해야한다는 것이죠. 인적자원을 장기적으로 가장 잘 만들어내는 것은 신입을 양성해서 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직자보다도 회사에 적절한 인재로 키워내기 좋죠.
저는 회사에서 수십명의 후배 기획자와 함께 일했습니다. 업무를 가르치고 업무를 나누기도 했고, 또는 저를 보고 배우게 하기도 했죠. 제 후배들은 카카오와 네이버, SK 등 많은 회사로 나가서 자신의 역량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강의를 통해서 특강이 아닌 정규 코스로 오프라인에서만 100여명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이 중 가장 먼저 배운 서비스기획스쿨 1기 수강생들은 제 수업 이후 서비스기획자로 취직하여 벌써 3년차 기획자로 성장하였습니다. 40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제 수업을 들었고, 브런치를 통해서 서비스기획 직군 면접을 준비했다는 주니어들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저의 여러가지 대외활동은 회사의 신입 채용에도 영향을 줍니다. 이미 우리 회사에 입사하려고 하는 친구들은 면접때부터 저의 브런치나 제가 찍은 인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부분은 홍보효과로서 작용하고 있죠.
앞으로의 10년은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그런데 여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저 스스로 장점이라고 여기며 이렇게 제가 회사에 기여할 수있는 부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 그것을 인정할 때 가능해집니다.
즉, 저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필요합니다. 저의 생각과 역량에 대해서 가치있게 판단해줄 곳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수행자나 일부의 업무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커머스 시장을 바탕으로 제가 공부하고 생각하는 장기적 비전을 함께 나누고 더 많은 기획자들을 양성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에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왔는데요. 지금까지 10년의 세월은 이커머스 도메인의 현장에 대해서 폭넓게 배우는 시간이었고, 충분히 가치 있게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플랫폼에 있었다면 고객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많이 할 수 있었겠지만, 전 그 기간동안 시스템에 대한 구조를 많이 공부하였고 이것은 저의 강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넥스트 스텝으로 넘어가야할 시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직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이유없는 미션의 수행자가 아닌 리더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전 '현장을 바탕으로 한 전문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얼마전 회사내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저에게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문가는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해줄 때 탄생하는 것 같다" 저는 이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합니다. 남의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전문가로 포장되어야만 계속 남의 일에 쓰임을 받기 때문일 뿐,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서 진정성있는 현장의 소리를 잡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수차례 겪은 프로젝트에서 내부 기획자와 일시적으로 프로젝트만 하러 온 외주기획자의 업무 이해도와 장악력은 엄청나게 차이가 났습니다. 전 인하우스에서 프로덕트의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진짜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앞으로의 10년은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도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곳에서, 비전을 향해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이커머스 기획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도 매일매일 웃기고 즐겁기만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제 삶은 항상 '허슬러'였습니다. 제가 꿈꾸는 '진짜 전문가'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생각의 방향성이 같은 일이라면 기고이든 강의든 사이드 활동을 통해서 주력하는 일을 하는 생각의 힘을 계속 키워나갈 수 있는 제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껏, 대체로 생각했던 대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는 모두 노력으로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현재의 고민들과 앞으로의 '행보'도 그렇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