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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Nov 28. 2020

도면 겹쳐보기의 삶

서른일곱번째 이야기


화방에 가면…화방에 가는 삶을 살고 있다니 글을 쓰면서도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아무튼 다시. 화방에 가면 얇은 반투명인 ‘트레이싱 종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 트레이싱(tracing)은 ‘흔적’, ‘추적하다’라는 뜻의 영단어 ‘trace’로부터 나온 말이다. 건축에서는 트레이싱 종이를 도면 위에 올려놓고 원도면을 따라 그리거나, 약간의 변형된 도면을 그린다. 종이 이름대로 기존의 것의 흔적을 찾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그린 트레이싱지를 잘 겹쳐서 빛에 대고 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도면에 층이 생겨 공간의 켜를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 2, 3층 도면을 겹쳐서 보면 모든 층의 관계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식이다.



팔림세스트(Palimpsest)

사본에 기록되어있던 원 문자 등을 갈아내거나 씻어 지운 후에, 다른 내용을 그 위에 덮어 기록한 양피지 사본



종이가 보급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양피지가 쓰였는데, 비싼 가격 때문에 한 번 글을 쓴 양피지는 기존 내용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본을 ‘팔림세스트(palimpsest)’라고 한다. 그 과정 때문에 옛날에 썼던 글이 최근에 쓴 글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기도 한다. 현재를 통해 과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alimpsest


시간은 흘러가는 것보다 쌓이는 것에 가깝다. 그 퇴적을 부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하는 것만큼 부당한 것이 있을까. 무언가의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존재한다. 과거의 역할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과거를 잊고자 하기도 하며, 과거에 머무르기도 한다. 과거의 상처 때문일 수도, 혹은 과거의 찬란함 때문일 수도. 하지만 우리의 불가항력의 법칙, 엔트로피 때문에 시간은 일방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새로운 현재를 맞이한다. 과거를 뒤로 하고 말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동상이몽이라고 해야하나. 과거에 발목 잡혀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 편이다. 내가 뭐라고 타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과거 또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현재는 무수한 과거로 이루어져 있기에. 반면,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미래는 그려지지 않고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장단점이 있다. 굉장해 보일 수도 있지만 허황될 수도 있다. 과거와 현재로부터의 도피를 목적으로 미래에 살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사는 사람은 응원해주고 싶다.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 법칙을 수용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어렵다. 누군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매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누군가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이며, 우리의 미래는 누군가의 과거일 수도 있다. 시간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만 같지는 않다. 그저 우리는 현재에 살 뿐이다. 과거를 뒤에, 미래를 앞에 두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이 불가피하다면 이왕이면 무게 중심이 미래쪽에 조금은 쏠려 있는 것이 좋겠다. 적어도 현재에 살아야 한다. 더욱이 과거에만 살지는 않아야 한다.


도면을 겹쳐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를 통해 과거의 흔적을 이해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받아들이며,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야 한다.



어떤 공간을 가면 뭔가 어슴푸레 겹쳐 보이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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