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광고 디자이너, 이직을 결심하다.
3년 전 나는 내가 이직을 결심하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유학생에게는 냉혹하게 느껴지던 미국 취업 시장에서 어렵사리 찾은 직장인데, 라는 생각으로 이직은커녕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심 끝에 나는 3년 간의 근무를 마지막으로 오늘 회사에 사표를 쓰고 나오게 되었다.
이직을 결심하기 앞서, 나는 한 발짝 물러나서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를 평가해보기로 했다.
회사 업무량이 내가 감당할 만한 정도인가? / 워라밸이 내가 만족할 만한 정도인가?
회사에서 내가 받고 있는 대우가 내가 납득할 만한 정도인가? (월급을 잘 주는 곳인가?)
팀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한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즐거운가? 이 일이 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인가?
회사 임원진이 직원들의 의견을 잘 반영해 회사를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있는가?
사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저 위의 조건들 중 많은 부분을 충족한다. 아니, 충족한다고 "생각했다".
10시 출근, 6시 칼퇴근, 워라밸이 잘 되어있는 것이 큰 장점인 곳이었고, 성격 좋고, 프로페셔널한 팀원들과 함께 원만하게 일을 할 수 있어 참 감사한 곳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의 방향이 세부적으로 잡히다 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의 괴리감이 점점 생기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올해 초, 회사에서의 인사이동 / 정리해고 시즌이 지나간 후, 아, 나도 긴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포트폴리오를 다시 손보게 된 것이 이직의 결정적인 계기였다. (물론 물가가 센 뉴욕에서는 박봉이라고 여겨지는 월급, 등등 그 외로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내가 밝힐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
이직을 결심하고 나서 포트폴리오를 손보고 나니, 남은 일은 LinkedIn (미국에서 제일 대표적인 구인구직 / 직장인 네트워킹 사이트)으로 열심히 지원서를 돌리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핸드폰으로 이 웹사이트에 접속해 오늘 올라온 채용공고를 확인하고, 지원서를 수정해서 보내고, 일이 끝나면 리쿠르터들의 이메일에 답신을 보내는 등등 약 3개월 동안 이 루틴을 반복했다. 답이 아예 안 오는 날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가득 쌓인 어떤 날은 마우스를 집어던지며 더 이상 못해먹겠다, 때려치우자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결심을 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에, 자존심에도 스크래치가 간 상태로 백기를 들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서 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해고를 당하면서 나와 동료 디자이너에게 떨어지는 업무가 더 많아졌고, 주말에도 일, 저녁에도 일, 붕괴된 워라밸 라이프에 이미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많이 떠나 있었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온 곳도 있었고, 정말 기대했던 곳이지만 끝내 답장을 듣지 못했던 곳들도 여러 있었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약속도, 자유시간도 모두 반납하고 면접 준비를 했다. 디자이너를 뽑는 회사들 중 대다수가 Design Test라고 서류 단계 후 두 번째 실기 면접에서 디자이너에게 과제를 내주는데, 디자인 구상에서 파이널 모의 과제 제출까지 시간이 꽤 소요가 되기 때문에 주말에도 컴퓨터를 붙잡고 작업을 해야 했었다. 가상의 주제를 가지고 과제를 내주면, 그 주제에 부합하게 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최종 과제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꽤 컸다.
일을 하고 있는 평일에는 점심시간 짬짬이 면접 약속을 잡아 리크루터들과 전화면접을 보았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건, 코로나로 인해 모두들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면접 볼 회사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돼서 너무 간편했다는 점. 면접 보기 10분 전에 일을 후딱 마무리하고 그나마 "예의를 갖춘" 옷을 걸친 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끝이었다.
3개월 동안 정말 다양한 회사들과 면접을 보다 보니, 그 새 면접 노하우도 생기고, 첫인상으로 이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덜 좋은 회사인지 (나쁜 회사라고는 얘기하지 않겠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를 수 있으니) 갸늠할 수 있는 육감도 길러졌다. 게임을 하다 보면 보스 몬스터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까지 여러 던전을 공략해나가야 하듯이, 나도 여러 라운드를 거치며 날고 기는 "보스 몬스터"들과 전쟁을 치렀다. 그중에는 감사하게도 내 편이 되어준 멋진 "보스 몬스터"도 있고, 도도한 자세로 날 위축하게 만든 고난도 보스 몬스터들도 있었다. 면접을 보면서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많은데 그건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