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꼰무원들
출근하자마자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합니다. 팀에서 제가 밥짱이기 때문이지요. 메뉴 결정하고 예약하고 회계처리까지 모두 저의 몫입니다. 다행히 지금 팀원들은 군말 없이 밥짱 결정에 잘 따라오시는 편이라 오히려 밥짱이 재밌기도 합니다. 설렁탕, 초밥정식, 백반, 샌드위치, 쌀국수 등 직장 근처 맛집탐방도 즐겁고요.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사무실을 합법적으로 탈출(탈옥 X) 할 수 있는 감칠맛 나는 힐링 타임이죠.
보통은 팀원들과 점심을 먹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과장님과의 점심시간이 있어요. 부서에는 4~5개의 팀이 있는데 팀별로 돌아가면서 과장님과 식사합니다. 일명 과장님을 '모신다'는 말을 써요. 과장님과 소통(?)을 위한 거라네요. 점심 먹는다고 소통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제가 속한 조직의 법칙이니까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편한 일은 절대 아니죠. 아니 너무 불편합니다. '그날'이 정해지면 직원들은 D-DAY를 초조하게 기다려요. 밥짱인 저는 '그날' 과장님의 연차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더랬죠.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과장님께서 좋아하시는 추어탕집으로 향합니다.
'A는 여기 앉고, B는 저 옆에 앉아. 팀장은 저기 앉고.'
과장님의 일방적인 자리 배치가 끝나면 일방적인 토크도 시작됩니다.
팀장님은 과장님 시야에서 잘 안 보이는 끝자리에 앉았네요. 팀장님은 과장님과 사이가 별로예요. 그래서 자리배치에서 밀렸어요. 팀장님이 부럽습니다. 과장님 바로 옆자리는..... 저예요. 하....... 저는 말이 없는 편이라 듣고만 있는 편인데, 다행히 바로 옆에서 선임 여자 직원이 과장님과의 대화에 맞장구를 칩니다. 저도 어떻게든 장단은 맞춰보려고 해요. 이렇게요.
점심시간은 술도 안 먹는데 뇌에 필름이 끊겨요. 기억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시간 동안 내가 한 말은 <하하하 정말요? 하하하 정말요?> 이거밖에 없는데 그날 오후는 이상하리만치 피곤이 몰려옵니다. 온몸에서 에너지가 다 빠져 나갔다고나 할까. 나는 <하하하 정말요?> 밖에 안 했는데.....
과장님은 내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가 아닐까?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자리 배치까지 맘대로 못 하는 그 시간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인품이 좋으신 상사라도 직원 입장에서 식사 자리를 반기기는 힘들어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수직적인 갑을관계에서 밥을 넘겨야 하니까요. 이제부터 '그날'에는 십자가 목걸이라도 해야 할까 봐요. 아니면 마늘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