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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Dec 21. 2023

받아랏 고백공격, 어느 공대녀의 삶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하면서 처음으로 남초사회에 진입했다. 고3 때 여자반에서 지낸 뒤 대학교를 공대로 선택하면서 다시 남초사회에 소속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친구를 표방했으나 곧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서로를 마음속에 품게 되면서 나와 남자사람친구의 사이는 '친구'가 아니라 '내 남자친구의 친구', '내 친구의 남자친구'가 되어갔다. 이후에 다닌 연구소, 대학원도 모두 남초였다는 건 꽤 자연스러운 전개지.


나한테 성은 정말 불필요한 요소였다. 나와 내 여성인 친구들이 성적이 잘 나올 때면 남자애들은 "교수님이 너네를 예뻐해서 성적을 잘 주셨다"라고 했다. 나도 기분이 나빴지만 교수님이 이 말을 들으셨다면 정말 기분 나쁘셨을 텐데 전해드릴 생각은 못해봤다. 남자들보다 성적이 낮게 나올 때면 뭐라고 했더라? 성적이 낮게 나온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남초사회에서 공부하고 성장하면서 나는 내가 여성인 게 너무 싫어졌다. 나는 여자라서 예쁘고 날씬해야 했다. 애교도 부릴 줄 알아야 했다. 웃지 않으면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항상 웃어야 했다. 선배들은 교수님과 성매매를 하러 다녔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선배들이 졸업하면 내가 교수님을 모시고 성매매를 다녀야 하는 것인지 걱정했다. 걱정에 그치는 게 아니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하는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으니 당시에 내가 느낀 압박감은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고역을 치렀다. 나는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홍보부스가 차려질 때면 내가 '인사'를 담당해야 했다. 우리 부스에 방문한 사람들은 내가 연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대기업 부스에 있는, 전문적인 행사진행여성이라고 생각했겠지. 나한테는 내 인사와 팸플릿만 받았고 기술이나 연구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나한테 물어본다고 해서 내가 잘 대답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나를 준비시키지 않은 회사를 탓할 영역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부스 나가는 날마다 회사의 기술에 대해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질문해서 회사의 영역을 소화해 두려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대표님과 선배들은 나를 보며 웃거나, 머리를 콩 쥐어박을 뿐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15년은 된 일인데 지금 생각해도 답답함이 생생하네.


회사의 회식은 n차까지 이어졌지만 나는 항상 1~2차까지만 하고 빠져야 했다. 그 뒤는 성매매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매매를 다녀온 뒤에는 성매매 업소에 대한 후기를 상세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아, 이건 가만히 있는 나한테 알려준 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나만 빼고 회식자리에서 무슨 얘길 하는지 너무 알고 싶었거든. 당시 연구소 업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꼭 내가 집에 가고 난 뒤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게 불쾌하다고 말했으나 또다시 나는 머리를 콩 쥐어 박히며 '귀엽게 투정 부리는 애'가 되어버릴 뿐이었다. "어이구, 그러니까 너도 남자로 태어나지 그랬냐."라는 선배가 건넨 나름대로 다정했던 위로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런 시간을 거치면서 나는 내가 여자인 게 점점 싫어졌다. 내 주변엔 여자보다 남자가 항상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남들은 마치 내가 그걸 선택한 것처럼 말했다. 나는 이 일을 선택했지 내 주변 남자들을 선택한 게 아닌데도.


내 인간관계는 점점 좁아졌다. 연구소 행정일을 챙겨주는 언니들, 나처럼 이 일을 선택한 정말 몇 없는 여자들이 내 유일한 동료였다. 언니들은 나를 대단하다고 말하면서 챙겨줬고 나는 그런 언니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해했다. 언니들이 보고 싶다.


이 언니들은 정말 몇 명 안 된다. 2~3년에 언니 한 두 명씩이 전부였으니 10년 동안 10명이 나도려나? 그 언니들을 제외한 수백 명이 전부 남자였다. 나는 무조건 남자와 일하고 공부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을 해왔다. 내가 좋게 보던 사람이 고백을 해줄 때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연인관계가 되어서 서로 알아가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애인이 있는 상황에서 고백을 받을 때, 혹은 연애대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고백을 받을 때였다.


고백을 받으면 "고맙다"라고 말하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일단 말했다. 고맙다고. 대체 뭐가 고마웠던 걸까? 못생기고 뚱뚱하고 괴팍한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맙다는 말인가? 고맙지만 사귈 수는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고백 때문에 한 명의 친구를 잃게 된 것이다. 나랑 가까이에서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고 자라나던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간 것이다.


혹자는 "네가 찼잖아? 네 몫이야." 말하겠지만 내 입장에서 남겨진 건 언제나 나였다. 나는 항상 가장 친한 친구를 고백으로 잃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남초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자랑하냐?" 같은 말을 하기도 하더라. 내 딴에는 정말 치열하고 처절한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친구를 잃고 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용기도 잘 나지 않았다. 또 나를 여자로만 보면 어쩌지? 그냥 제발 부디 여자 말고 사람이고 싶었다.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남자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네덜란드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한 기숙사를 쓰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 게 부러웠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내가 발가벗고 다녀도 아무도 나를 보며 연애, 데이트, 섹스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 세상.


10년 넘게 항상 연애를 하며 지냈다. 문제는 내 연애상대들이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구남자 친구들은 내가 남자와 공부하거나 남자와 일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본인들 또한 나랑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나를 좋아했고 사귀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니까. 통제를 받으며 공부하고 일하는 날이 많았다. 시험준비나 스터디도 남자가 있으면 극도로 경계했고 야근을 하더라도 야근이나 회식멤버 중에 남자가 있으면 긴장하고 짜증 냈다.


너무 답답했다.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았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 너도 남자들 빼고 사회생활 해보라고. 너도 공대생인데 모르겠냐고. 여기서 여자랑만 공부하고 일하는 게 가능한 곳이냐고. 아마 구남친 전부에게 적어도 두세 번씩은 소리 질렀던 것 같다. 제발 자유롭고 싶었다.


내 샤우팅은 공기 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가 힘들었구나' 따위의 말을 얹어주는 남자 친구는 없었다. 그래. 전부 내 업보지. 네가 고백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어.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해보지만 당시엔 그런 선택지도 없었다. 공대에서 연애 못하는 여자는 정말 심각하게 '하자'있는 여성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거든.


이렇게 계속 남초조직에서 일하다가 결국 병을 얻었다.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하고 나서야 겨우 커리어를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었다. 이제 여성들만 있는 곳을 찾아서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월급이 최저임금으로 변해버렸다. 일하는 사람들만 여성이지 관리자는 죄다 남성이었다. 도망갈 곳이 없다고 느끼던 어느 날 직장에서 성희롱을 겪었고, 그걸 문제 삼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뻔한 전개인가?


그러고 나서 원서를 넣은 곳이 성폭력상담소였다. 예전에는 성폭력상담소에서 주는 최저임금으로는 삶을 꾸려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곳이었지만 이미 월급이 반토막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과 관리자까지 여성인 곳, 성차별이나 성폭력 없는 직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시 내겐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성폭력상담소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다시 야생으로 나왔다. 요즘 나의 방황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많은 남자들에게(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그렇게 많지도 않다.) 고백공격을 받았고 상처받고 고립되었다. 어떻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고민은 성교육 선생님으로서 나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꼭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매번 말로는 잘도 떠든다. "여러분 성은 아름다운 거예요. 여러분을 더욱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여러분 스스로를 알아가는 데 성적인 나를 이해하는 건 의미가 크답니다." 부디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나한테도 성이라는 것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면 좋겠다. 혹시나 애들한테 성은 폭력이나 차별의 매개가 될 수 있고, 위험한 것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겁주면서 말하는 선생님이 될까 봐 두렵다.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아.


나를 해방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여성인 나도 사랑해주고 싶다. 마음은 정말 간절하다. 어떤 노력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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