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 Jul 23. 2020

건망증


나도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지 몰랐어.

너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못 할 말을 기억하며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내가 나조차도 사실 좀 새롭거든. 너는 웃는 게 예쁘다는 말에 나는 너랑 헤어질 때도 제대로 못 울었잖아. 웃을 수는 없었어. 사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는데, 웃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맞았잖아. 거기다 나는 배우도 아니라 그렇게 슬픈 상황에서 웃을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최대한 울지 않으려고 노력만 했어. 그렇게 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네가 없는 공간에서도 숨이 넘어갈 듯 울 수는 없더라. 말이 무섭지, 나는 네가 그렇게 애틋했는데. 그래서 밥을 먹다가 잠깐, 네가 생각나는 노래를 듣다가 잠깐, 너와 같이 봤던 영화를 보면서 잠깐, 그렇게 잠깐씩만 울었어. 언제 네 전화가 다시 걸려 와도 울지 않은 체를 할 수 있게.

있잖아.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할까, 아니면 네 생일로 할까, 비밀번호를 설정했던 날 기억나? 결국엔 네 생일이 비밀번호가 됐잖아. 사실 그 비밀번호는 아직도 네 생일이야. 헤어지잔 말은 네가 해놓고서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너는 서러울 때마다 나를 찾아왔잖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나를 찾아와서 네가 하고 싶은 말들만, 놓고 가고 싶은 마음들만 잔뜩 쏟아내고 가잖아. 나는 또 바보같이 너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숨을 골라주고, 물을 한 잔 손에 쥐여주고, 그러다 울음이 멎으면 너를 바짝 마른 침대 위에 뉘어 재우고, 아침이 되면 네가 좋아하는 김치랑 콩나물을 잔뜩 넣어서 해장국도 끓여주고. 새벽엔 그렇게 쏟아내기만 하던 애가 아침만 되면 말이 없는 게 반쯤은 원망스럽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귀여워 보였어. 나 이미 망한 거지? 알아. 그래도 괜찮아. 내가 너를 찾아가서 그러지는 않잖아. 나에게 찾아오는 너는 이렇게 기껍지만, 네게 찾아가는 나는 불청객일 테니까.

새로 만난 애인은 어때? 술 마시고 찾아와서 새로 만난 애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애인의 무심함에 대해 말하는 네 말 속에는 과거의 나도 들어있는 것 같아. 나는 너한테 온 힘을 다해 다정했는데, 그게 너한테는 모자랐던 거지. 그래서 만난 새 애인은 왜 너를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 걸까. 네 상처를 그 사람은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 자꾸 이만큼만 무심하기를 바라게 돼. 네가 더 아프지는 않게 더 무심하지는 않길 바라는데, 네가 가끔 이렇게 나를 찾아올 수 있게 지금처럼 조금은 무심했으면 좋겠어. 이제 너를 울릴 일도, 웃게 할 일도 없지만 네 입에 가장 맛있는 해장국은 끓일 줄 알게 됐으니까. 이 재능이 버려지는 건 아쉽잖아.

이전 16화 다정한 애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