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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 Jul 23. 2020

버스 정류장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대답이 몇 번 놀리는 손가락으로 제 형태를 맞추어 누군가의 답장이 되고 나서야 입 안에 맴돌기 시작했어. 손가락으로 눌러 형태를 빚을 때는 그렇게 아프더니, 입 안에 굴리니 이제 아프지는 않고 쓴맛이 가득해. 일곱 살 남짓 되었을 무렵. 아빠가 손에 들고 삼키던 그 알약이 얼른 먹고 싶어 어른이 되고 싶었던, 가루약이 약 중에는 제일 싫었던 때에 지겹도록 맛보았던 익숙한 맛이야.

나는 이제 이별을 이유로 마음 놓고 앓을 수도 없는 나이고, 이별 그 자체보다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해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뒷말을 더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됐어. 그런데 당신과 함께 보냈던 시절은 그렇지 못해서, 이제 잊지는 못해도 덮어는 뒀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다시 불쑥 솟아나네.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오후에 반차 좀 써도 될까요? 당신 생각이 마음을 쿡쿡 찌르더니 정말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 가라앉은 목소리와 어두운 낯빛에 상사는 놀라 얼른 들어가 보라며 등을 떠밀지만,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은 게 오늘만큼 고마웠던 적은 없었을 거야.

내 면허는 장롱이 아니라 지갑에서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당신 생각에 체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나는 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여느 드라마처럼 택시를 잡아타고 싶은데, 이번 달 카드 대금이 얼마나 되었나 가늠해 보다가 그도 그만뒀어. 옥탑방 월세도 겨우 사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이런 때에 아무렇지도 않게 택시를 잡아서 타던데, 그건 어쨌든 전부 그냥 드라마일 뿐이니까. 그들은 등장인물의 하루를 살면서 돈을 받아가지만, 나는 하루를 살면서 돈을 쓰는 사람일 뿐이니까.

당신과 미래를 약속하며 손가락을 걸었을 때에, 나는 이즈음 때가 되면 나는 차를 끌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나는 여전히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그 어느 것 하나 닮지 않은 정류장은 버스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당신을 떠올리게 해. 세상이 좁아 걸어가기에는 멀고, 택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나이에 우리의 다리가 되어주던 것은 이 버스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 근처의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와중에도 잠시도 쉬지 않았잖아. 그땐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뭐가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지나가는 바람에도 웃으며 당신 손을 놓지 않던 때가 있었지. 같은 20분 거리가 그땐 그렇게 멀고, 지금은 또 왜 이렇게 가까운지. 늘상 창문에 고개를 박고 잠을 청하던 퇴근길에 모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당신을 되새김질했어.

샤워조차 귀찮아서 손만 대충 씻고, 허물을 벗듯 외출복만 벗어던지고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갔어. 당신을 떠올리면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절망은 아직도 이렇게 커서, 평소엔 혼자 살기에 넓다고 생각했던 이 빌라가 비좁아. 덮어쓴 이불 탓에 호흡이 더워져서 다시 이불을 내리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당신 얼굴을 그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어. 이미 해는 졌고, 당신에게서는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어.

어떻게 지내느냐는 당신 연락에 하루가 꼬박 지나서 잘 지내고 있다는 답을 한 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고민했던 흔적이야. 그런데 사실 그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어떤 대답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당신이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아서 조금 울고 싶어 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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