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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희 Jul 24. 2022

최악일 때 더 최악인, 최악론

   아픔이나 슬픔이나 실패가 최악일 때 더 최악인 건 내 상황 따위 최악 축에도 끼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내 마음은 너덜너덜 해 졌지만, 따지고 보면 누군가에 비해 별 일이 아닌, 그런 일에 불과할 때, 게다가 보다 더 최악을 사는 사람들이 조금만 많은 게 아닐 때, 그래서 최악이야 하고 바닥에 드러누울 수 없을 때, 스스로에게 감사를 강요할 수밖에 없을 때, ‘이 놈의 인간사!’ 세상은 검은빛을 그리며 최악이 된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죄다 아파야만 하는지, 죄다 아파서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하는지, 아프다고 징징 거리는 것조차 스스로를 나약하게 굴어야 하는 건지. 이건 정말 최악이 아닐 수 없다.    


                           

   이 최악론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비애이지만, 슬프고 또 감사하게도 난 정말이지 누군가에게 내 삶이 꽤나 평탄했다고 평가받는다 하더라도 그리 큰 반박을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게다가 가끔씩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고,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아무리 해도 잘나 지지 않는 내 인생이 그럼에도 웃기고 감사할 일이 많다고 느낄 때도 꽤 많았다. 이 기억들이, 이 사실들이 내 최악을 최악일 수 없어 더 최악이게 만들었다.              


                 

   긍정과 회피로 눌러왔던 최악들을 철저히 보호하던 철갑들, 그것들을 본격적으로 한 겹 한 겹 떼어내기 시작하면서 최악론은 더욱이 빛을 바랐다. 누군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보여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적당하고 충분했던 내 삶이 어느 한 편에서는 이해받지 못한 채 곪아 있었고, 완벽을 위해 외면해 왔던 그것들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힘없이 다치고 또 다쳤다. 한 번 다친 곳은 또 쉽게 다치게 되듯, 같은 아픔이 반복될 때면 면역이 생겨 더 잘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더 쉽게 아파지고 더 많이 아파지고 그래서 마주하기가 두려워질 뿐이었다. 최악이 아닌 내가 느낀 나의 최악이 최악일 수 없어 더 최악이어야 했다. 그런데 스스로 조차 과거의 최악들에 대해 제때 알아주지 못했다는 사실, 그 사실에서 오는 또 다른 아픔과 해결 혹은 치유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달라지지 않은 현재에 사무쳐 스스로에게 가져 버린 연민이, 아픔을 사실보다 더 아프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마치 한 번 다쳐 본 곳은 조그마한 자극만으로 사실보다 더 큰 통증이라 착각하게 되는 현상처럼 말이다. 외면해 온 것을 직면해 내는 과정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내 최악이 최악일 수 없어 더 최악을 느끼는 정도를 평탄하게 살아온 삶이라 친다면, 최악을 최악으로 느끼는 정도면 불행한 삶이라 쳐도 되는 걸까. 자신의 삶을 최악으로 느끼며 불행했노라 털어놓는 그의 삶을 듣고 있자니 그 삶은 분명 불행이 컸다. 타고난 조건이 특별한 데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불행 속으로 끌어넣는 경향도 강했다. 그를 알았던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불행과 세상에 느끼는 분노와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 세상 행복하고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인생에 풍랑 없이 잔잔한 일들만 겪을 수 있기를 바라 주겠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나쁘고, 세상은 더럽고, 자신의 삶은 불행 투성이었던 그가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좋았노라 말하는 나의 안녕에 마음을 쓸 수가 있는지, 그 말이 혹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다 해도 그건 깊은 여운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 늘 그렇듯 좋은 것을 계속되도록 가만히 두지 않기에, 돌고 돌아 다시 최악을 최악일 수 없어 최악을 맛보던 한 날, 직면에 대한 부작용을 발견했던, 연민에 과도하게 사무쳤던 바로 그날, 그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이 최악이 큰 풍랑인가 잔잔한 바람인가. 최악이 최악일 수 없으니 이건 잔잔한 것에 불과하겠다는 결론. 그래서 억울했고 그래서 위로했으며 위안했다. 이 최악이 살다 보면 언젠가 다 지나간 일처럼 생각될 수 있을지. 별 일 아닌 일이 될 수 있을지. 아님 짊어지고 갈 연민 일지. 그의 지표에 따라 차분히 시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감정은 객관성을 잃기 마련이지만 시간은 그 객관성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가졌기에 이따금씩은 감정을 미루고 시간에 기대어 볼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들여다보면 아픔 없는 인생이 없다는  인간사, 좋은 것이 지속될  없는  인간사에서 어쩌면 계속해서 행복하기를 빌며 살게 아니라  불행,  최악이 없기를 바라면서 사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행복이라 생각한다면 많은 부분 쉬워지고 편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 그가 바래   마음은 어쩌면 그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다면, 나의 안녕을 바라기로  이후, 그동안 그의 삶이  바람과 닮았었을지... 내어준 마음과 덕분에 받은 위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가 풍랑 없이 잔잔한 일들만 겪을  있길,  안에 담긴 행복을 알아내길 바라는 바이다. 부디 과도할지 모를 연민을 걷히고, 최악이 최악일  없어  최악이라 억울해서 행복하기를...  그를 향한 마음과 나를 향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이전 13화 '열심히 해'에 반격하는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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