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벽을 쌓고 있으면 그것이 지닌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왜곡된 시선을 갖기도 한다. 거기에 두려움과 상상이 더해지면 벽은 더 견고해진다. 독일의 동화작가 브리타 테켄트럽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빨간 벽》은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스스로 세운 마음의 벽이 다채롭고 아름다운 세계와의 만남을 어떻게 차단하는지 보여준다. 첫 페이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벽 없는 세상을 위해”라는 작가의 말에서 책 속에 담긴 메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림책 《빨간 벽》의 원제는 “Little Mouse And Red Wall”이다. 그림책 앞표지는 빨간 벽돌로 쌓은 높은 벽이 표지를 거의 꽉 채우고 있다. 벽 꼭대기에 작은 생쥐 한 마리가 앉아있다. 뒤표지를 펼치면 사자와 곰, 고양이, 여우가 벽 위의 생쥐를 올려다보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벽에서 갑갑함이 느껴진다. 앞 면지 그림이 어두운 잿빛이라면 뒤쪽 면지 그림은 색색의 빛깔로 채워져 탄성을 자아낼 만큼 찬란하다. 마음의 벽이 사라진 뒤의 모습이다.
“빨간 벽은 언제나 거기 있었어요.” 색깔을 잃어버린 집들과 나무들이 빨간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곳에 사는 동물들은 그 벽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른다. “난 정말 궁금해. 벽 너머에 뭐가 있을까?” 모두가 벽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지만, 호기심 많은 꼬마 생쥐는 벽 너머 세상을 궁금해한다.
꼬마 생쥐는 겁 많은 고양이에게 빨간 벽이 왜 세워졌는지 묻는다. 고양이는 벽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있는 것이며, 위험한 바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고 말한다. 고양이의 말에서 벽을 위험한 세계로부터 지켜주는 안전장치로 여기며, 다른 존재와 세계를 배제하고 차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벽을 쌓게 하고, 교류와 소통 대신 배제와 단절을 부른다.
벽 너머에 대한 고양이의 시선은 2018년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와 코로나19 시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혐오 범죄를 떠오르게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작동했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그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퍼져나갔다.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난민 신청자들을 예비 범죄자로 만들며 갈등을 증폭시켰었다.
코로나19 이후 타자에 대한 차별의 벽은 더 견고해졌다. 우리나라에선 외국인이, 미국이나 유럽에선 동양인이 배제하고 차단해야 할 타자가 되었다. 외국인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이를 옮긴다는 한국인의 생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동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고,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 영상은 또 다른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마음의 벽은 종종 벽을 넘어 무기가 된다.
꼬마 생쥐는 늙은 곰에게도 빨간 벽이 왜 세워졌는지 묻는다.
“곰 할아버지, 저 빨간 벽은 왜 세워진 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구나, 저 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단다. 이제 내 삶의 일부야.”
꼬마 생쥐의 궁금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곰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 한다. 늙은 곰은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이가 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시들해지고, 욕망도 하나, 둘 내려놓게 된다.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삶에 대한 의욕과 생기를 잃어버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 듦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가능하게 해 준다. 늙은 곰에게서 나이 듦의 지혜를 발견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저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아니, 여우야?”
“벽 뒤에 뭐가 있든 무슨 상관이야. 꼬마 생쥐 넌, 질문이 너무 많아,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테니까.”
언제나 행복한 여우는 현재 자기 삶에 만족하는 유형이다. 현실에 안주해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낙천가이다. 어느 시기엔 평범함 속에서 행복은 찾는 여우와 같은 삶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삶에만 만족한다면 변화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삶의 빛나는 순간들도 만나기 힘들다.
꼬마 생쥐는 다시 으르렁 소리를 잃어버린 사자에게 묻는다.
“사자야, 저 벽 뒤는 어떤 세상이야?”
“벽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커다랗고 시커먼 없음이 있지.”
사자는 벽 뒤엔 “커다랗고 시커먼 없음”이 있다며 생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본다. 사자의 말에서 깊은 절망과 허무가 느껴진다.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기 삶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희망, 기쁨, 의욕, 활기를 잃어버린 모습은 슬프고 공허하다. 삶의 한 복판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당당하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모습이다. 사자의 모습에서 나이 들어가며 공허와 무기력에 자주 빠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어느 날 벽 너머에서 빛깔 고운 새가 날아온다.
“파랑새야, 넌 어디서 왔니?”
“이 벽 너머 세상에서”
꼬마 생쥐는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다며 파랑새에게 벽 너머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파랑새와 함께 벽 너머로 날아간 생쥐는 색색의 빛깔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세상을 만난다.
“여기는 껌껌하고 으스스할 거로 생각했어. 내 친구들이 그렇게 얘기했거든.”
“그 친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봐서 그래. 너는 궁금해하면서 봤잖아. 넌 정말 용감했어. 진실을 스스로 찾아 나설 정도로 말이야.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서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너 스스로 만들게 돼. 하지만 네가 마음과 생각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그 벽들은 하나씩 사라질 거야. 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할 수 있을 테고.”
꼬마 생쥐가 벽 너머 세상에 대해 친구들에게 말해 주겠다며 돌아보았을 때, 늘 거기 있던 벽이 사라졌다. 벽을 찾는 생쥐에게 파랑새는 벽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꼬마 생쥐는 친구들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세상을 말해 주고, 친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벽을 통과해 찬란한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사자도 꼬마 생쥐랑 친구들을 찾아 벽 너머 세상을 향해 발을 떼었다.
동물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갇혀 있다가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음의 벽을 허물어 가능했다. 꼬마 생쥐의 호기심은 파랑새를 불러들였고, 파랑새를 통해 벽 너머의 찬란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파랑새와 꼬마 생쥐가 없었다면 나머지 동물들은 언제까지나 벽 안에 갇혀 두려움과 무기력, 절망 속에서, 또는 현재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림책 속 ‘빨간 벽’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벽의 안과 밖은 하나인데 마음이 벽을 세워 차단하고, 구별 짓고, 두려워하며 배제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생쥐가 보여주는 각각의 모습은 각자의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젊은 날엔 생쥐의 호기심과 용기가 주인이 되었다면, 나이가 들어선 늙은 곰의 무심함이나 사자의 무기력과 슬픔이 자주 힘을 발휘하듯이 말이다. 한때 나는 두려움 없는 꼬마 생쥐의 호기심에 이끌려 살았지만, 지금은 늙은 곰과 사자의 기운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다. 다행히 곁에 있는 파랑새 같은 사람들이 있어 내 마음의 벽 너머 세상을 보여준다. 《빨간 벽》을 읽으며 내 안의 파랑새가 벽 너머 찬란한 세상을 향해 다시 날아오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