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힘

- 꽃은 기적이다 -

by 혜아


꽃을 샀다. 제라늄, 카네이션, 금낭화, 캄파넬라, 마가레트, 패랭이, 체리 세이지, 루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휑하던 발코니 화단이 환해졌다. 거실문을 열면 밀려드는 꽃향기에 저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그중 루핀 향기가 가장 진하고 향기롭다. 루핀은 내게 아름다운 기억을 심어준 꽃이다.


내가 처음 루핀 꽃을 만난 것은 바버라 쿠니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였다. 학교에 근무할 때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보물처럼 들고 다니던 책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림 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색감과 풍경이 날 사로잡았다. 주인공 앨리스는 어릴 적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머나먼 세상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볼 거예요.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 와서 살 거고요.”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데 네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단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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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앨리스는 '미스 럼피우스'로 불리며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다. 만년설이 뒤덮인 봉우리를 오르고, 정글을 뚫고 지나고, 사막을 횡단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되어서는 어릴 때 꿈처럼 바닷가 마을로 돌아왔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조그만 정원을 꾸미고, 바위 투성이 땅에 꽃씨를 뿌렸다. ‘정신 나간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름 내내 꽃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들판과 언덕에 씨앗을 뿌렸다. 이듬해 들판도, 언덕도, 도랑도, 돌담도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루핀 꽃이었다. 세상 구석구석에 꽃을 피워 할아버지와 약속했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해낸 것이다.


내가 처음 진짜 루핀 꽃을 본 것은 십오 년 전 뉴질랜드의 남섬이었다. 한 달 동안 크라이스트처치 바닷가 마을에 머물며 주말에는 남섬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밀퍼드 사운드 가는 길엔 하양, 노랑, 분홍, 파랑, 보랏빛으로 물든 야생화 들판이 이어졌다. 천 가지 색깔을 가졌다는 루핀 꽃 무리였다. 신비스러운 밀크 블루의 테카포 호수와 루핀 꽃으로 뒤덮인 들판 풍경은 내가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그림책 속 풍경이었다. 루핀 꽃이 흐드러진 호숫가에서 꽃 빛깔과 향기에 취해 한참을 앉아있었다. 마치 내가 그림책 표지의 ‘미스 럼피우스’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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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미스 럼피우스≫와 함께 꼭 읽어주었던 책은 사라 스튜어트의 ≪리디아의 정원≫이었다. 주인공 리디아는 아빠의 오랜 실업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도시에 사는 외삼촌 집에 보내진다. 빵집을 운영하는 외삼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만 무뚝뚝하고 웃음이 없었다. 리디아는 외삼촌 얼굴에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할머니가 보내준 꽃씨와 모종으로 황량한 옥상을 꽃이 가득 찬 정원으로 바꿔 놓는다. 리디아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꽃들로 환해진 옥상정원이 나오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와~ 와~” 하며 감탄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땐 아이들 얼굴과 눈빛도 리디아의 정원만큼이나 환하게 빛났다.


재작년 봄 학교를 떠나며 보물처럼 싸 들고 다니던 이백 권이 넘는 책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의 마지막 제자가 되어준 아이들을 위한 열여섯 권의 책은 따로 챙겨두었다. 내가 좋아하고, 읽어 줄 때마다 아이들도 유난히 좋아했던 책들이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가장 어울리는 책을 골랐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 내가 소중히 아껴온 책과 새해 다이어리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미스 럼피우스가 뿌린 꽃씨가 세상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바꾸었듯이, 한 권의 책이 아이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길 바랐다. 리디아가 들고 있던 해바라기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밝히는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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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힘이 세다. 함박웃음을 짓게 한다. 마음을 열게 한다. 꽃을 보는 사람에게서도 향기가 나게 한다. 꿈을 꾸게 하고, 살고 싶게 한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도 두려움 없이 달려가게 한다. 내게 꽃은 기적이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꽃의 기적이 늘 함께했으면 좋겠다.


지난밤엔 꿈을 꾸었다. 세 칸 초가집의 하얀 흙 마당과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어린 내가 꽃밭을 만들고 있었다. 땅을 파고, 거름 뿌리고, 꽃씨를 심었다. 돌멩이를 주워 꽃밭 둘레도 꾸몄다. 나뭇가지를 휘어 꽂고 작은 온상도 만들었다. 아버지는 꽃밭 옆에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탱자나무 울타리와 포도나무 사이를 새들이 날아다녔다. 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거실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꽃향기가 훅 밀려왔다. 새로 만든 작은 나의 정원에서 뭔가 꿈틀대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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