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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날 Nov 22. 2023

러너스 하이를 처음 느꼈다



이십대 초반, 운동과는 멀찍이 거리를 두는 초식형 인간이었던 나는 해군에 입대하면서 본격적으로 몸 쓰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땀 흘리는 재미를 알고부터는 근력과 유산소 가리지 않고 골고루 운동을 해오고 있다.


“니, 러너스 하이라고 아나?”


경상도 출신 해군 훈련소 동기의 말이었다. 그는 연병장 구보를 마치고 숨을 고르고 있던 내게 이렇게 물었다. 러너스 하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너가 다니던 입시학원 이름이니? 하고 되물으려다가(왜인지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입시생들이 강의실 안에 빽빽이 모여서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학원의 모습이었다) 실제로는 그저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했다.


동기의 말에 따르면, 장거리 달리기를 훈련한 사람은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달리기를 지속하면 호흡이 안정되고 기분이 고조되는 ‘러너스 하이’ 모드에 들어간다고 한다. 자신이 방금 러너스 하이가 왔었다고, 이대로는 언제까지든 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자랑하기 위해 내게 말을 건넨 것이었다.


‘군대에서 흔히들 심심풀이로 하는 구라라는 게 이런 거구나’


동기의 말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을 굴리면 힘들어야 마땅하거늘, 달릴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니. 당시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동기의 말을 가볍게 한 귀로 흘려보냈지만, 기억 속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뭘까.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대략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달리기를 취미로 삼은 지 6개월 째 되던 어느 날, 나는 동네 산책로에서 처음으로 러너스 하이를 경험했다.


당시 나는 주말마다 10km씩 달리면서 나름대로 달리기 훈련을 하고 있었다. 기록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보면서 달리기에 재미를 붙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기록의 상승세가 꺾이고 몇 주 동안 기록이 꿈쩍을 안 하자 달리기에 권태기가 찾아왔다. 권태기를 느끼던 어느 날 나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기록 갱신은 단념하고 한번 느긋하게 달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1km에 5분 30초 페이스로 달리던 것을 6분대까지 늦추고는 평소의 80% 속도로 달렸다. 자동차로 예를 들면 기어를 2~3단 낮추고 태평하게 운전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30분을 달리고 있는데,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면서 마치 봄바람을 맞는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8년이라는 시간에 파묻혀 있던 훈련소 동기의 말이 기억 속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거봐, 거짓말 아니지?’ 하고 다시 한 번 우쭐대는 모습으로.


이게 러너스 하이라는 거구나. 훈련소에서 했던 심심풀이 구라가 아니었구나. 이 사실을 8년 만에 깨달았다는 생각에 조금 억울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러너의 영역에 한발 더 다가간 것 같아서 뿌듯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러너스 하이가 자주 오는 편은 아니다. 온다고 해도 오래가지 않는다.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 정도 지속된다. 러너스 하이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두근대는 심장박동과 거친 숨소리가 잠잠해진다. 한발 한발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다리가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러너스 하이는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 걸까.


장거리 달리기를 오래 한 사람일수록 휴식기 심박수가 낮다고 한다. 주인님이 언제 달릴지 모르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야지, 하고 심장이 적응하는 모양이다. 달릴 때의 과부하를 대비해서 심장이 미리 대기모드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휴식기 심박수가 낮아진 러너가 달리기를 시작하면 심박수는 얼마간 요동치다가 천천히 올라가면서 안정적인 수치에 도달한다. 그 수치는 사람에 따라서는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의 평상시 심박수인 경우도 있다. 누군가 달릴 때의 심박수가 다른 누군가 가만히 있을 때의 심박수와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 도달하면 러너는 달리는 중에도 몸과 마음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장거리 달리기를 취미로 삼고 나서 휴식기 심박수가 많이 떨어졌다. 늘어지게 쉬고 있으면 분당 심박수가 50 초반까지 떨어질 때도 있다. 스마트워치에 기록된 심박수를 아내가 보더니 이정도면 거의 죽은 거 아니냐고 한다.


그런 아내의 농담을 가볍게 한 귀로 흘린다. 콩닥. 콩닥. 천천히 리듬감 있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심장아 귀 막아.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돼.




이미지 출처: Amber Hawkins, <shond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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