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도중에 배가 아프면 어떨까.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그런 상황이 내게 예기치 않게 와버렸다.
주말에 약속이 잡혔다. 나는 주말 오후에 달리는 루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약속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달리기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오전에 짬을 내어 달리기로 했다. 숙제를 일찍 해치우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아침 일찍 러닝화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느리게 달리는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느리게 달리면 몸에 가벼운 자극이 들어가서 근육의 모세혈관이 발달하고 근지구력이 성장하는 데 좋다고 한다. 1km에 5분 20초 페이스였던 것을 5분 50초로 낮추자, 평소 달릴 때는 180 정도였던 심박수가 150까지 떨어지면서 달리는 내내 안정된 자세와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안정을 했다보다. 달리는 도중에 편안해진 아랫배가 꾸르륵, 꾸르륵 하고 비둘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는 신호였다.
달리기 경력 3년. 그동안 1,500km 남짓 달렸지만 달리는 도중에 이런 신호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평소에는 밍기적거리고 있을 시간에 움직여서 몸이 자극을 받은 걸까. 자극은 근육만 받으면 되지 어쩌다 장까지 받은 걸까. 달리는 자세와 호흡에 집중하던 머릿속은 어느새 잡생각으로 가득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달리기를 해서 나오는 땀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주인님, 얼른 화장실에 가서 큰일을 치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소화기관은 눈치 없이 자꾸 신호를 보냈다. 목표 거리로 잡은 10km는 진작 까맣게 잊고 나는 동네 강변에서 고개를 두리번대며 화장실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길게 자란 잡초 위에 주저앉아버릴까, 교량 기둥 뒤에 숨으면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 와중에 청명한 날씨가 나를 반겼다.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아침 햇살조차 야속해 보였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냐. 달리는 도중에 든 생각이었다.
고속도로 버스 안에서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지는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휴지 미리 준비하기, 염치 무릅쓰고 기사님께 통사정하기 등). 그러나 이른 아침의 동네 강변에서 겪게 될 상황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메뉴얼이 머릿속에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눈과 귀를 열고 화장실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주변에 건물 하나 없는 강변 한복판에서 신호가 올 건 또 뭐야. 야속할 게 많은 아침이었다.
이 경험으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달리다가 배가 아프면 생각보다 오래 달리면서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이다.
5km 정도 달리고 있을 때 배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는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화장실을 찾고 싶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작은 상가 건물의 화장실을 10분 만에 찾을 수 있었다. 대책 없이 들어간 건물의 화장실은 다행히도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고, 안에는 휴지도 구비되어 있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참새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이른 시간, 나는 이름 모를 상가 건물의 화장실에 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밖에서 평화롭게 울리는 새소리와 화장실 안의 무거운 공기가 대조되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오늘 일어날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휴지를 움켜쥐고 변기에 앉아서 화장실의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때 만약 달리기를 멈추고 걸었다면 나는 이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험한 꼴을 당했을 수도 있다. 외줄을 타는 것 같이 아슬아슬한 순간을 무사히 지나왔다는 생각에 묘한 쾌감이 들었다. 삶의 긴박한 순간에서의 선택은 이렇게도 중요하다. 그나저나 이제는 휴지를 주머니에 넣어 놓고 달려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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