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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의 밤이 지나고 나면

by 하루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당시에 나는 주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다니던 대학교 앞 편의점이었는데 근처 아파트 거주민과 학생 손님들이 많았고, 새벽녘만 되면 유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담배를 사러 단골로 오는 곳이었다. 당시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한 탓에 이런저런 알바를 찾아보다가 결국 시간이 맞는 아르바이트가 주말 동안 편의점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다.


내가 들어오면서 곧 그만두시는 편의점에서 먼저 일하고 계시던 아르바이트생 분은 나에게 '웬만한 막일 일이 여기보다 나을 수 있어요'라는 경고를 하며 떠나셨다. 자기가 여러 막일 일을 해보았지만 여기보다 오히려 났다고 했었다. 나는 편의점이 일이 힘들어야 봐야 얼마나 힘들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게 앞에는 파라솔을 친 테이블을 두었는데, 학생들은 그곳에서 술집에서 못다 한 술자리를 했고, 어르신들은 맥주며 오징어를 가져다가 담소를 나누시곤 했다.

편의점은 엄청 잘되어서 새로 들어온 재고를 쌓아둘 틈도 없이 계속 손님을 받아야 했다. 그제야 그 아르바이트생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곳은 최소 2~3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어야 할 편의점이었다. 그렇게 편의점에서의 5~6시간의 근무 시간은 끊임없는 바코드 찍기와 재고 정리, 야외 테이블 정리로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처음 이겨내야 했던 것은 '육체적 노동의 고됨' 보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당시만 해도 아는 친구들이 오고 가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이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면에서는 생활 형편이 어렵다는 것으로 보일 텐데라는 걱정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생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학교 앞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욱 컸었다.


언젠가는 아는 친구들을 만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시간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다.

평소처럼 계산을 해드리고 다음 손님을 받는데 같은 과 친구가 맥주를 두 손에 든 채 놀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둘 다 아무렇지 않은 양 인사를 하고 계산을 했는데,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늦은 저녁 맥주며 소주를 사는 과 친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있고 나니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부끄러움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 덕분인지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의 종류가 크게 늘어났는데, 심지어 나중에는 교내에서 막노동일을 하다가 친구들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은 수준까지 가게 되었다.


손님께는 '한 없이 목'을 굽히며 수그러들어야 했었다.

대개는 편의점에서 결제하는 것이 그러하듯 일찍 계산하고 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특정 손님들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엄마 카드를 들고 온 아이 손님은 결제 후 30분 있다가 어머니와 함께 나타나 환불해 달라는 경우가 일수였다. 아이는 사실 이해한다 치더라도 어르신들도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막상 마셔보니 본인이 원하던 술이 아니었을 경우 종종 되돌아오곤 하셨다. 웬만큼은 보통은 그냥 환불 처리해드리려고 하지만 가끔 이미 상품이 훼손되었을 경우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편의점 사장이었으면 어찌어찌해서 넘어가겠지만 나 역시 일개 편의점 직원인 탓에 '미안하다', '죄송하다', '어쩔 수 없다'를 연거품 되뇌며 훼손된 상품은 환불이 어렵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사과하며 설득해야 했었다. 손님들이 호통을 치고 떠나면 그다음 손님이 나에게 괜찮으시냐며 위로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으론 그것이 감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참으로 비참했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내게는 그 모든 것들이 상처로 다가왔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을'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 좋은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손님면에서는 오히려 유흥가에서 일하시던 분들이 참 깔끔했었다.

항상 새벽녘 필요한 에셋 세븐을 사가시는 유흥가 종사자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쓸데없는 얘기도 안 하고 필요한 것만 들고나가서 이런 분들과는 거의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다. 서로 새벽까지 고생하는 동료의식이었는지, 아니면 그래도 내가 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보다는 났다는 연민의식이었는지, 혹은 삐쩍 마른 애처로운 학생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여서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분들은 참 깔끔했다.


그래도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즐거웠던 점도 꽤 있었다.

편의점에서 음악을 원하는 선곡대로 틀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팔로알토의 이 밤이 지나고 나면]이라는 곡을 너무 좋아했는데 편의점에서 일하는 시간 내내 그 곡을 틀어 놓고 듣고 있었다. 당시 최저임금 4,000~5,000원 수준이었지만 사장은 편의점은 원래 법정시급보다 적게 주는 것이라며 최저임금 아래로 주셨다. 폐기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아량도 없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의자도 빼놓은 무지막지한 편의점이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음악만큼은 내가 원하는 곡으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편의점에서의 알바 생활 이후 받은 월급은 30만 원이 안되었는데 그마저도 가끔 계산 실수가 나면 내 돈으로 메꾸기도 해야 해서 실제로는 20만 원도 못 번 달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가 나는 감사하게도 군대를 가게 되었다. 부끄러움도 많고 사회에서 '을' 생활도 처음 해 본 어린 나에게는 오히려 군대가 돈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이후 군대 생활도 녹록지만은 않았지만 내게 삶을 잠시 재정비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 되었주었다.

제대하고 나서도 여러 가지 각종 사고, 알바, 상처들이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는 내가 어떤 생활에도 버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어 모두 감사한 시간들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의 삶을 감사하게 되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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