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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도 사라져 갈 장면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정(情)이 있는 풍경

by 한정호

어렸을 적 숙모님은 미장원을 하셨다. 지금처럼 간판을 달고 매장을 운영한 건 아니었다. 지인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긴 보자기를 어깨에 걸치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대야에 모이고, 사람들은 수다를 떨며 기다렸다. 나도 큰 외삼촌 댁에 가면 공짜로 머리를 깎고 오곤 했다. 그 기억은 오래된 듯하면서도, 눈앞에 생생하다.

동네 자녀의 결혼식도 마찬가지다. 웨딩홀이 아닌 마당 한켠, 대문 앞에 천막을 치고, 이웃들이 모여 술자리를 벌이고, 노래판이 열렸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기쁨을 자기 일처럼 축하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아니 시골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이렇듯 서울에서는, 시골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장면들이 베트남에선 가끔 펼쳐진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애처로움 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 나는 이유는 아마도 나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리라. 아름다운 추억 같은 풍경들을 모아 보았다. 이러한 풍경은 아마 베트남에서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듯 하다.


베트남에서도 곧 잊혀져갈 장면들


1. 거리 이발소

큰 간판도 없는 길가 이발소. 나무 그늘이나 작은 천막 아래, 낡은 의자 하나와 거울 한 장 걸어 두고 머리를 깎아주는 풍경. 머리를 깎는 동안 오토바이가 옆을 스쳐 지나가고, 손님은 종이컵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한국 시골에서도 70~80년대까지 흔했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KakaoTalk_20250919_192706173_01.jpg 동네 이발소 전경
20250919_202709.jpg 동네 이발관 전경
20250919_203730.jpg 조금 업그레이드된 이발관, 실내는 변동이 거의 없다
KakaoTalk_20250919_192706173_02.jpg 이미 현대화되는 이발소와 메이크업 샵들로 대체되고 있다

2. 동네 결혼 피로연

골목길 전체를 막고 천막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춤과 노래를 즐긴다. 신부·신랑 옆에는 온 마을의 아이들이 들락날락하고, 이웃집 사람들은 반찬을 나르거나 서빙을 돕는다. 한국에서도 마당에서 벌이는 잔치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호텔 웨딩홀 문화가 지배적이다.

KakaoTalk_20250919_192706173_03.jpg 동네 도로를 점거하고 결혼 축하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
KakaoTalk_20250919_192706173_04.jpg 노래방 기기에 목청껏 마을 주민 신경 안쓰고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3. 이동 사진사와 즉석 사진 인화

길거리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나 작은 인화기를 싣고 다니며 가족사진이나 증명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특히나 관광지 주변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라고 달려 오는 기사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사진을 바로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에서 옛날 한국의 ‘동네 사진관’을 떠올리게 한다.


4. 시장 좌판 문화

새벽 시장에 나가면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부터 사람들이 골목에 자리를 펴고 생선, 채소, 과일을 늘어놓는다. 가격표도 없고 계산기도 없지만, 손님과 눈치만으로 흥정을 끝내는 풍경. 한국도 예전엔 오일장이 이런 역할을 했다.

20250704_174018.jpg 도로 한 모퉁이에 앉아 집에서 기른 채소를 들고나와 좌판을 벌인 아낙네
20250704_175825.jpg 집에서 따온 파파야를 펼쳐 놓은 좌판 상인
20250704_182009.jpg 초등학교 앞 도로, 인도가 아침 저녁으로 시장으로 변신하다
20250704_182152.jpg 아이들과 함께 좌판을 펼친 아주머니
20250704_182215.jpg 방금 잡아 온 것이니 길거리 생선도 신선하리라

5. 동네 장례식 풍경

집 앞에 천막을 치고 흰옷을 입은 상주와 친지들이 길가에 앉아 곡을 하는 모습. 밤새 촛불이 켜지고 동네 사람들이 들렀다 가며 국수 한 그릇, 술 한 잔을 나누는 장례 풍습. 한국에서도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던 시절엔 비슷한 풍경이 있었다.


6. 대문 없는 이웃집 왕래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다가 이웃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담소가 이어지고, 아이들은 서로 다른 집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저녁이 되면 식사거리를 조금씩 들고 나와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한다. 내 것 니 것이 없이 조금씩 가지고 나온 것들로. 지금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열린 공동체’의 모습이다.

20250706_180625.jpg 너른 마당에 모여 맥주로 목을 축이고, 노래방 기기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20250702_182511.jpg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앉아 밥상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7. 동네 놀이판

저녁 무렵이면 골목에 나와 맨발로 축구나 배드민턴을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웃으며 구경하는 어른들.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 ‘공차기’와 ‘고무줄놀이’가 한창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20250706_164733.jpg 모두들 맨발로 축구를 하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신발을 신으면 반칙인가?

8. 비 내린 후 거리 풍경

비가 퍼붓고 난 뒤 도시는 금세 강처럼 변한다. 배수가 잘 되지 않는 도로는 물이 허리춤까지 차오르고, 오토바이는 파도를 헤치듯 지나가며 차들은 거북이걸음을 한다. 물결이 일렁이는 거리 풍경은 불편하면서도 베트남의 장마철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jpg 국지성 폭우가 내리면 바로 강물처럼 변해 버리는 도로 전경 [ long Thanh ]
비2.jpg 마치 강위로 보트가 지나가듯 물파고를 일으키는 모습 [ Long Thanh ]
비3.jpg 마치 시골 마을의 개울 위로 달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도시의 도로 모습 [ Long Thanh ]


9. 지상 전깃줄 풍경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도로 위로는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이 늘어져 있다. 전봇대마다 덕지덕지 이어 붙인 선들이 바람에 출렁이고, 덩굴처럼 치렁치렁 내려앉은 모습은 위험해 보이면서도 베트남 거리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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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0_074659.jpg 연결이 끊어져 널부러진 전선까지. 가끔 전기공이 와서 수리를 할 때면 해당선을 찾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10. 아이스커피 좌판 풍경

길모퉁이 작은 좌판에는 얼음이 가득 든 통과 플라스틱 컵 몇 개, 그리고 작은 의자가 놓여 있다. 아침마다 서민들이 모여 5천~1만 동짜리 아이스커피 한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베트남 사람들의 하루를 여는 소박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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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0_074623.jpg 도로 옆, 인도 위, 개인 주택 앞 아침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가보다

11. 새벽시장 손수레 행렬

해가 뜨기도 전, 골목마다 채소와 과일, 생선을 가득 실은 손수레가 줄지어 움직인다. 장바구니를 든 이웃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정하는 소리로 새벽시장은 활기를 띠며, 아직 잠이 덜 깬 도시를 먼저 깨우는 풍경이 된다.


이 모든 풍경들은 단순히 낯선 나라에서 본 이색적인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한때 함께 누렸던 일상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에서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잊고 있던 나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듯하다. 하지만 도시화와 경제 성장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지금, 이 장면들도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눈에 담아두고 싶다. 언젠가 사진 한 장, 기억 한 조각으로만 남게 될 이 풍경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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