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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ug 23. 2024

이주와 모자, 소파가 있는 환대 이야기

24.08.22 17:18 씀

집 떠나온 이 길고 뾰족한 모자를

그는 피난처의 중심부를 향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말했


무겁지 않을까

끄트머리에 찔릴 것만 같군

처음 보는 디자인이야

기괴한 것 같기도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집 떠나온 이는 밤낮으로 걸었

걸으면서 졸기도 했는데 그때 그의 모습은 창을 든 기마병 같았지 고개를 떨군 탓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던 길뾰족한 모자가 수평선 쪽으로 푹 꺼 거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말했지


깜짝아

잘 때 걷더라도 모자는 벗지 그래

굳이 저렇게 까지 해서 어딜 가려는 거야

모자가 벗겨지진 않네 신기하다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어느 날 피난처에 편지가 하나 도착했어

집 떠나온 이가 보낸 거였지


- 곧 가겠습니다 -


피난처는 분주히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어

중심부에 놓을 소파부터 새로 주문했지


앉거나 누울 이을 그대로 받쳐주고

후루룩 마시기 좋은 캐모마일 차의 온도를 담은

푹신한 소파였어 


집 떠나온 이에겐 최적의 선물이었지


리고 어느 날


 - 똑 똑 똑 -


집 떠나온 이가 피난처 문을 두드렸어

길고 뾰족한 모자도 함께였지


피난처는 창문과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그를 반겼어

모자를 받아주려고 손을 건넸지 그러자 그가 한 발짝 물러섰어


- 괜찮습니다 -


피난처는 머쓱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계속했어

그를 위해 준비한 소파를 보여주었지 편히 쉬라는 인사도 빼먹질 않았고 웃으면서 자리를 비켜주었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말했지


모자 정도는 벗어도 괜찮지 않나

무례하기도 하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지도 몰라

쑥스러운가 보지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피난처는 기다리기로 했어

자신에게 온 사람들마다 사연이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


사연이 다르면 시간 법칙도 달랐어 누구에겐 1분이 1분 그대로 흘렀고 다른 이에겐 1분이 3초 같았고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겐 1분이 1시간 같았거든


많이 보았어 자신이 준비한 소파 위에 앉거나 누워 있으면서도 똑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그래서 피난처는 기다리기로 했어


똑 소리 무어냐고

관절 인형 있지 마디마디 사람처럼 움직이는 그거

관절들의 연결점들을 떠올려 봐

쪽은 툭 튀어나와 있고 한쪽은 툭 튀어나온 무언가를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지

그러니까 한쪽은 들이밀고 한쪽은 받아주고

소켓이라나 할까


피난처를 찾아오는 쪽은 들이밀어

그가 쓴 툭 모자처럼 길고 뾰족한 것을

그때 피난처는 그걸 안아줘

안락하고 푹신한 소파로


그리고 다시 기다려 똑 소리가 날 때까지 

양 쪽이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였기를 하면서


집 떠나온 이들은 철저히 소파 위에서 생활하거든

거기서 앉아 있다가 자기도 하거든

그러다 몸을 뒤척일 때


- 똑 -


툭 튀어나와 있  부러뜨리고 말거든

그렇게나 뾰족한 걸 폭신한 것 안에서 부숴버리거든


똑 소리는 불시에 찾아와 

똑 소리는 자애롭 웃어

똑 소리는 외국어를 어설프게 읊고

똑 소리는 인스턴트 라면을 자주 끓어


그즈음, 피난처는 목에 두른 타올로 이마 위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똑 소리가 났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

그리고 박수를  가까스로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듯이 묵직하고 명쾌 웃어 

이야 드디어 해냈구나 하고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하지


축하해요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해낼 줄 알았어요

신이시여


한창 떠들다가 길을 잃어버리지


"그런데 모자가 뭐였더라?"



똑 소리 이후 시간이 꽤 흘렀어

집 떠나온 이의 머리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


튀어나와 있던 부분은  뭉툭해졌어

부분 부분 깊게 파인 곳도 보이고


그런 그를 피난처 찾아왔어

수제 쿠키까지 들고점검을 나온 셈이지

 소리 이후에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보자 조금만 더 있으면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걸요

- 더 큰 일이라는 건 튀어나와 있것을 이하는 거였지

집 떠나온 이가 결국 피난처가 되고 피난처의 중심인 소파를 주문하는 거였어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


이제 이방인 티는 벗었군 그래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멋진 일이 생길 거야

역사는 계속된다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뭉툭한 게 그 사람의 정체성이군"


다음 날 피난처에 편지가 한 통 도착


- 곧 가겠습니다 -


피난처는 씩 웃으며 그가 앉은 쪽을 바라봤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소파를 준비할 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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