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어떻게든 그 옷들을 버린다는 게 아까워서 잠옷으로도 써보고, 일부러 입어보기도 했지만
옷들이 하나둘씩 쌓이더니 방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옷들은 짐이 되어 불어나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 그 옷들을 안고 갈 순 없었습니다.
옷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많았습니다.
이 옷은 나와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 한 옷이고, 이 옷은 대학교 축제 때 입은 옷, 이 옷은 첫 출근날 입은 옷, 이 옷은 누구에게 선물 받은 옷 등
남들이 보기엔 입지 않은 비슷한 옷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저한테 만큼은 하나하나 추억이 있는 옷들입니다.
사람들에겐 각자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다릅니다. 저에게 이 옷들도 이미 제가 포용할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감정만으로 쓰지 않는 옷들을 가지고 있기엔 제 발목을 붙잡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놔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쯤으로 동네 골목에 외롭게 서있는 의류수거함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전에는 나의 물건들을 버릴 때 어찌 됐건 내 인생의 일부를 함께 했던 것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물건들을 한 번 더 보며 과거를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녕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런 안녕의 시간들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려준 건 웃기게도 사람입니다.
안녕의 시간을 가진다 해서 결과가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녕의 시간은 단지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기에 관계를 끊지 않으려는 최후의 몸부림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몸부림이 길수록 이별이 더욱 아프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이별의 순간부터 칼로 잘라내듯 끊어내는 이별이 그나마 덜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한 번 안녕을 하고 나면 내 인생의 일부였더라도 더 이상 돌아오진 않습니다. 버린 것이 아닌 잃어버린 물건이라면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해 돌아오기도 하지만 버린 것은 아닙니다.
버릴 때 차가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과거를 상기시키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는 알게 된 이상 마지막 인사는 접어두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이별의 방식은 다릅니다.
이별에 최대한 아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별을 길게 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나만의 이별기준을 정해놓고 아팠으면 합니다. 그 기준이 일주일이라면 일주일 동안 한 없이 아파보고
기준이 지난 시점부턴 예전의 일상을 행했으면 합니다.
일상에서 울음이 쏟더라도, 가끔은 맥없이 쓰러지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한 발짝씩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그런 울음도, 쓰러짐도 점점 줄어드는 나를 보며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