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갑(甲) 슈퍼 계(癸)

초보 대표의 좌충우돌 사업일기 - 1월 9일 목요일

by 훈남하이 김대표

우리 회사의 정식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이다. 물론 이 시간을 지켜야 하는 사람은 나와 Y뿐이다. 사실 업종 특성상 주말 근무도 많고, 밤에 일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에 나름 유연출근제를 적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전날 밤 11시까지 야근을 했으면 다음날 점심 먹고 출근을 한다든지 말이다. 어쨌든 오전 10시에 맞춰 출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지난 주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전화번호. 이제는 바로 저장을 했기 때문에 누군지 안다. XX구청 문화관광과 XXX주무관. 귀인이지만 급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했다. 우리가 제출하기로 한 제안서의 마감시한은 2월 첫째 주였고, 그 때까진 아직 많이 남았기에 무슨 일인가 했다. 전화를 받았다. 누구보다 활기차고, 누구보다 다정하게.


2분여의 통화. 길지 않은 통화시간의 요지는 시기를 당겨달라는 거였다. 무려 열흘이나. 내가 2월 첫째 주까지라고 이야기한 게 바로 중간에 설 연휴가 끼어있어서였기 때문이었는데, 내 계략은 삼국지 속 제갈량 앞에 하후무나 다름없었다. 남은 시간은 3주도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제안서는 두 개였다. 내 목표는 설 연휴 지나고 바로 하나 제출해서 일찍 제출했다는 평을 받고, 그 다음 주 초에 다른 제안서를 마저 제출해서 이 회사 일찍 잘 해준다라는 평을 받는 거였는데... 결국 설 연휴도 쉬지 못하고 출근각이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우리 Y도.


사실 담당 주무관은 나에게 해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찌 정중한 부탁일 수 있겠는가? XX구청은 슈퍼갑이고, 나는 슈퍼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계)인 것을. 그들 앞에 난 그냥 북방에 있는 몸뚱아리 큰 닭 한 마리에 불과했다. 일단 다 할 수 있다고, 가능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상황이지 않은가? 내일까지 해달라고 해도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게 우리인데 뭐 실제로 불가능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또 긍정의 샘이 솟는다.


출근해서 Y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긍정의 기운 가득 담은 미소와 함께. 가뜩이나 한숨을 달고 사는 그가 카트라이더 풍선 아이템처럼 머리에 한숨 하나 더 달았다. 핀을 들어 그 한숨을 터뜨리고, 작전 회의에 돌입했다. 설 연휴 전까지 자료 조사를 하고, 대략적인 틀을 만든 다음 설 연휴 때 본격적으로 작성을 해서 핑퐁으로 검토를 하고, 설 연휴가 끝나는 화요일에 하나 제출, 그리고 그 주 금요일에 나머지 하나를 제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혹자는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설 연휴까지 2주 남았으면 설 연휴 전에 끝내면 되지 않냐고. 일을 해본 사람이면 안다. 미리 할 때보다 직전에 하는 게 훨씬 쫄깃하고, 내용도 알차며, 긴장감도 돈다는 것을. Y도 동의. 아니 오히려 Y가 먼저 설 연휴 때 빡세게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꽤 든든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일을 발주하는 곳이 갑일 것이다. 그것도 절대 갑. 갑을이라는 말을 싫어해서 우리가 갑의 입장에서 쓰는 모든 계약서는 동행으로 바꿔 쓰고 있는데, 뭐 내가 을의 입장이라면 마음대로 동행하자고 할 수 없으니, 대개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무리해 보이는 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말 불가능한 일 아니면 일단 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수습하는 편이다. 다행히 수습은 지금까지 원만하게 이뤄졌고,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고 나면 업력도 쌓이고, 자신감도 커져왔다. 하지만 그 마음고생의 과정에서 Y랑 참 많이도 싸웠고, 스스로도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 버거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결국 다 할 수 있다고 말함은 업력 및 자신감을 감정소모 및 깎인 HP와 교환하는 영수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다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가 생겨나고, 그 변화를 실은 차의 핸들을 틀어 긍정적인 쪽으로 이동하게 하는 건 오롯이 나의 역할이니까. 또 다 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의 방증이니까 그런 우리의 상황에,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일을 제안하는 업체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그래도 때론 우리에게 전해오는 압박과, 우리에겐 턱없이 부족한 예산, 그리고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진 데드라인을 보면 숨이 턱 막힐 때도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가 조금은 주도권을 쥐고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에서처럼 강하게 ‘그 때 까지는 조금 힘들 거 같습니다. 다른 업체 소개해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저희랑 하시겠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우리 사이클에 맞춰서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늘 점심을 뭐 먹을지 고민인데 대개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강압적으로 말없이 먹고 싶은 메뉴의 식당으로 가진 않는다. 뭐 먹을지 물어본다. 그 때 Y는 이렇게 말한다. “다 괜찮아.” 내가 우리에게 일을 발주한 회사에게 하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Y도 내가 그 회사들이나 지자체에 느끼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내일은 Y가 다 괜찮다고 해도, Y가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어쨌든 오늘은 얼큰한 돼지고기 김치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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