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피곤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꽤 오래전부터 지쳐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 완화와 악화를 반복하면서 만성화된 걸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인 피로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적되면 약이 없다. 무기력하게 시간에 기대서 상태가 나아지기를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몸을 조금 움직이면 전환할 수 있는 기분이랑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친 몸과 마음은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피로감에 무너져 내린다. 그럴 때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허우적대면서 가까스로 무력감을 털어내고 나면 힘이 하나도 없다. 젖은 모래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축 처지는 기분이 든다. 정신을 차리면 우울감이 몰려온다. 막을 틈도 없이 앙상한 늑골 틈새로 파고들어 오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다.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참다 보면 사는 게 버겁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힘든 원인이 뭔지 모르겠다. 이유를 안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살면서 뜻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내 마음도 남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사는 게 아니라 그저 견디고 있는 것 같다.
부정적인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물러간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잠시 물러갈 뿐이다. 때가 되면 다시 돌아와서 집요하게 나를 물고 늘어진다. 지루한 반복이 이어지다 보면 마음은 버티지 못하고 꺾여버린다. 아픈 마음에 잘 듣는 약은 없다. 사람을 만나고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곳에 가도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저 나아지기를 막연하게 기다릴 뿐이다. 낮은 짧고 밤은 길다. 잠들기 전까지 잡초처럼 자란 쓸데없는 생각들을 머리에서 솎아낸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삶은 반복이다. 화끈한 반전이나 짜릿한 역전이 없다는 사실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래서 다들 자극적인 콘텐츠에 열광하고 당첨을 기원하면서 유통기한이 붙은 꿈을 산다.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한 날들의 연속이다. 행복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찰나에 불과하다. 살아있어서 기쁘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힘든 일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우울이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삶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열심히 사는 것은 보람찬 일이지만 그만큼 피로와 권태를 동반한다.
어두운 방 안에 가만히 누워서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소중한 기억도 풍화되어 귀퉁이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갔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더는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나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없다. 기회비용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도 어차피 후회가 남는다는 사실을 아는 나이가 됐다. 달라지는 것은 많지만 변화하는 것은 없다. 전보다 더 늙고 나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피곤해서 쉬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서 슬럼프라는 단어를 골랐다. 의미는 비슷하지만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친구들끼리 캠핑을 가면 새벽까지 모닥불을 피워놓고 가만히 불을 바라본다. 감정을 땔감 삼아 불속으로 던져 넣었다. 고3 시절 담임은 네가 힘들면 남도 힘들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그때는 고3은 누구나 힘드니까 주눅 들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사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사람답게 사느라 힘들다. 카톡으로 쓸데없는 말만 하루종일 주고받으면서 진심은 숨기고 본심은 감추고 산다. 나도 시시하고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 됐다. 사는 게 참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