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이세의 꿈
서기 2038년 도쿄, 일본은 세계의 향수 시장을 석권하였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정확히 예측하였다. 이제 향수는 대량 생산과 대량 판매의 시대가 지났고, 저마다의 개성을 중요하게 여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프라이비트(private)한 주문 향수 시대가 온 것이다.
일본은 어느 나라보다 빨랐다. 첨단 산업의 발전과 거대 한 자금력으로 새로운 형태의 향수와 향수 숍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세계 곳곳에 체인 형태의 향수 숍을 열어 향의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패션과 향수, 그리고 꿈이 있던 도시 파리는 퇴조되어 가고, 도쿄는 이제 떠오르는 태양으로 향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길거리의 모든 곳에서는 제각기 독특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고, 수도꼭지처럼 생긴 거리의 자판기엔, 개인 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하면 어떤 향이든 맡을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각 가정의 컴퓨터엔 3차원의 영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 느낌의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는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있으며, 향수 CD까지 발매하고 있을 정도다. 도쿄의 편의점에서는 알루미늄 캔으로 만든 자연 향을 팔고, 즉석에서 향을 믹스해서 판매하는 사이버 퍼퓸 머신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지 유쾌해질 수 있고, 슬퍼질 수도 있으며, 용감해질 수 있도록 인간의 감정을 자유롭게 바꾸는 센스 사이버 향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세는 긴자의 중심지에 있는 은빛 유리 건물 앞에 서 있다. 그 유리 건물은 세계 최대의 향수 회사인 다케오의 본사 빌딩이다. 이세는 54층에 있는 다케오 체인의 직영점인 일루시옹을 방문하기 위해 서울에서 온 것이다. 이세가 54층 행 엘리베이터의 버튼에 손끝을 대자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올라간다.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지만, 향긋한 레몬향이 코를 찌른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네이비블루 칼라의 유니폼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이세를 안내한다.
"이세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는 아이코라고 해요."
이세는 아이코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핑크 빛이 감도는 첫째 방은 대형 멀티비전 몇 대와 인체 모형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이세는 인체 모형의 틀 속에 들어가 몇 개의 스위치와 선을 몸에 부착하고, 컴퓨터를 작동하는 아이코의 지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대형 화면에 수백 가지의 꽃, 색과 숫자, 도시들이 나타났다. 이세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센서를 통해 원하는 장면들이 화면에 나타나고, 그 느낌은 컴퓨터로 전달되었다.
한참 후, 코끝의 엷은 막을 통해 처음 맡아보는, 아주 특이한 향이 스며져 나왔다.
"이세 씨, 이 향이 바로 당신의 향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입력된 자료들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소재를 선택하고, 선택된 로 머트리얼의 합성을 통하여 가장 뛰어난 향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이세는 수없이 지나간 영상의 느낌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라스, 파리, 블루, 블랙, 라벤다, 로즈, 통가 콩, 1960, A-LINE‥‥‥
둘째 방으로 안내되었다. 하얀 천 같은 얇은 물질로 뒤덮여 있는 방은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든다. 손으로 그 막을 헤쳐도 손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홀로그램이다. 아이코가 보이지 않는다. 이세가 두리번거리며 아이코를 부르자, 얇은 망사로 가슴과 중요한 부분을 가린 세 아가씨가 나타난다. 그녀들은 이세의 옷을 벗기고, 얇은 망사의 팬티만 걸치게 한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이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아이코가 나와 이 방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세 씨, 이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 사이버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당신이 좋아하는 여인의 냄새와 함께 말이에요. "
이세는 아이코에게 약간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코 양, 난 섹스를 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일루시옹의 회장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요.”
"이세 씨,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 아가씨 중 한 명과 과거로 여행을 떠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이코가 몇 개의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는 여러 개의 숫자와 글자가 뜨기 시작한다. 1920년 파리, 1800년 베네치아, 72년 로마, 1609년 니스, 히말라야, MOTHER...
이세는 빨간색 망사 팬티를 입은 아가씨와 함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3D 글라스와 장갑을, 코에는 잭을 꽂고‥‥
이세가 MOTHER라고 적힌 화면의 끝에 손을 대자,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된 우주의 끝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가씨와 이세는 몸에 아무런 것도 걸치지 않고 잔잔한 호숫가에 누워 있었다. 코끝에 약간 끈적거리며 짠 느낌의 향이 배어 나온다. 멀리서는 박동 소리 가 일정하게 '쿵! 쿵!'거리며 들려온다.
"여기가 어디요?"
이세가 아가씨에게 조용히 묻는다.
"저는 이곳이 처음이에요. 그리고 어머니를 몰라요. 다케오 씨가 저를 만들어 주신 분이거든요."
이세는 이 아가씨가 사이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손가락 끝으로 호수의 물을 찍어 맛본다. 그리고 끊임없이 코끝을 세워 그 냄새를 맡아본다.
"아, 어머니!"
이세는 아가씨의 머리를 잡아 호숫가에 처박는다.
"너희 사이버 인간은 어머니를 몰라. 이곳은 바로 어머니의 뱃속이란 말이야."
이세는 흐느끼며 오랫동안 어머니의 냄새를 기억해 내려고 노력하였다. 한참 후 호수의 물이 마르고 갑자기 좁은 입구로, 긴 터널의 끝을 향해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탄생되는 출산, 바로 그것이었다.
이세는 여러 개의 방을 거쳐 마지막 방에 도착했다. 이곳은 직접 향수를 만드는 곳이다. 아이코의 안내를 받아 빛으로 꾸며진 방으로 들어가자, 온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석진 곳에 대형 화면이 있는데, 갑자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화면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70대의 자그마한 일본 노인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세군, 잘 왔네. 내가 다케오라네. 당신의 조향 실력을 보고 싶어 이곳으로 불렀네."
다케오는, 그동안 수많은 조향사와 이곳에서 시합을 해왔고 지금껏 단 한 명의 조향사도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이세군, 이제 문제를 내겠네. ‘사랑’의 향을 만들어 보게나. 난 컴퓨터의 시뮬레이터를 통해 향을 만들고, 자네는 이곳에 있는 수천 가지의 향료를 이용해 만들어야 하네. 단 한 시간 만에 말일세 "
화면이 꺼지고, 다시 방 안에 현란한 불빛이 어우러졌다. 이세는 아이코의 안내로 조향 시설이 되어 있는 탁자에서 한 시간 만에 만들어야 하는 ‘사랑’의 느낌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하였다. 천천히 알루미늄 캔 속에 있는 원료들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며, 비커에 하나둘씩 섞기 시작했다. 베티버, 만달린 오렌지, 라벤다. 월하 향, 페퍼민트 등 수십 종의 향을 조합하고, 땀을 닦으며 조향의 시간은 계속되어 갔다. 끝내기 전 마지막으로 향을 맡아보지만, 그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이세는 고개를 흔들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그 속에 담긴 액체와 만들어둔 향수를 섞어 흔들어댄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빛이 사라지고 화면이 켜졌다. 다케오가 나타나, 이세의 향수와 자신의 향수를 비교해 보자고 한다. 다케오의 향수는 영롱한 빛을 띠고, 아름답고 상쾌한 향을 지닌, 꿈과 사랑이 어우러진 빛의 향수였다. 다케오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하다.
이세는 자신이 만든 향수의 병뚜껑을 열기 시작하였다. 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혼란한 색깔도 점차 정리되면서 아름다운 무지갯빛을 띠우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아이의 살 냄새 같은 부드러운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며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물결친다.
다케오는 점차 얼굴이 흑색으로 변하며 말했다.
"이세군, 내가 졌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 이곳에 있는 원료로는 그 향수를 만들 수 없었을 텐데‥‥‥‥
이세는 웃으면서 지나가듯 말하였다.
"다케오 씨. 둘째 방에서, 여행을 떠났던 곳에서 어머니 자궁의 양수를 담아 왔지요. 어머니의 향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