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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 후각으로 떠나는 여행

5. 왕포 마을의 곡두

5. 왕포 마을의 곡두1)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운무 속의 큰 성을 찾아내고는 진시황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불로장생의 명약 불로초를 구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진시황은 그에게 많은 보화를 주었다. 그는 당장에 배를 구해 성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가도 가도 그곳에 도착할 수 없었고, 그 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항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았던 바다 위의 큰 성은 환상이었나?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봄 냄새가 물씬 풍기는 3월 어느 날, 나는 김제역의 플랫폼에서 빠져나와 부안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해의 일몰,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지는 태양을 서서히 삼키며 실루엣을 늘어뜨리는 변산반도 모항의 일몰을 보기 위해서였다.


석양이 질 무렵 부안에서 갈아탄 버스가 변산 해수욕장을 지나 종점인 격포항에 도착하니 어둠이 짙게 내린다. 이곳은 제법 큰 마을로, 버스터미널이 있는 것을 보니 변산반도의 중심지인 듯하다. 이곳에서 일단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눈 시린 아침 햇살은 겹겹이 얇은 종이를 포개 놓은 듯 채석강의 암석을 두꺼운 사전처럼 보이게 한다. 미역과 소라의 냄새가 진동하는 격포항을 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변산의 내소사로 가는 버스의 출발 시간이 되어간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차는 있지만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10분, 20분, 거의 30분을 기다리다 이곳저곳에 물어보니 기사가 버스 안에서 자고 있을지 모르니 버스 문을 두드려 보란다. 문을 세게 두드리자 기사가 부스스한 눈으로 문을 열어 주며 왜 잠을 깨우느냐는 표정이다.    

 

내소사에 봄이 왔다. 산뜻한 숲 냄새가 내게 미소 짓는 내소사 입구에서부터 벌써 봄이다.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기다림을 참지 못한 꽃들이 고개를 내민다. 목조 건물과 흙, 초목과 불전의 향이 한데 어우러져 봄 냄새를 퍼뜨려 산사의 고요함을 깨운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 냄새인가. 좋은 냄새는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리가 탁한 마음을 가져 미처 그 향기를 듣거나 맡을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제 해가 지기 전에 모항으로 가야 한다. 모항에 도착하니, 태양이 서서히 기울며 바다에 투영되고 있다 길게 뻗은 석양의 잔상이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너무나 황홀한 광경이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일몰을 보며 하루를 묵고 싶어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리조트로 갔다. 그런데 그곳은 시설에 비해 숙박비가 터무니없이 비싸 머물지 못하고, 딱히 갈 곳을 정하지 못했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연의 풍광을 미끼로 부당하게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생각나는 곳, 내소사에서 돌아오다 보았던 대하(왕새우) 양식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왕포라는 곳이다. 이 시간에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무작정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다행히 승합차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었다. 50호가량 되는 작은 어촌 마을인 왕포, 그곳 바닷가 가까이 작은 모텔이 한 곳 있었다.

제철이 아니어서인지 썰렁한 느낌이 들었지만, 2층 방에 들었다. 큰 창문이 작은 베란다로 통하게 되어 있어, 바로 아래쪽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소리 없이 밀려오는 밀물의 행진에 눈을 빼앗긴다.

 어쩐지 이상하다. 지금껏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 무엇이 이곳에 존재하는 듯하다.

 아! 소리가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차 소리, 사람 소리, 바람 소리, 그 어떤 들림도 없다. 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그 정적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서움은 편안함과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적막 속에서 잠이 든다. 내 영혼에 속삭이는 바다 냄새를 맡고 눈을 뜬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잿빛 해무 속에서 어렴풋이 산과 성의 형상이 다가온다. 진시황의 불로초가 있다던 성이 바로 이 왕포마을의 곡두가 아닐까?


얼마 후 해가 떠서 빛이 흐르자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젯밤 미처 보지 못한 바다 건너 반도의 육지 마을이 새벽안개 때문에 곡두로 보였던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난다. 향기가 소리가 되어 내 귀에 들린다. 썰물이 시작되나 보다. 서해의 비릿한 냄새가 온몸을 감싸며 왕포의 곡두를 전설 속으로 날려 보낸다. 언제까지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다.




 

최근 향의 추세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물과 바다의 냄새를 인위적인 합성 향료로 만든 것이 오셔닉, 아쿠아틱 계열의 향수이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향을 사람의 손에 의한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지 않고 자연에서 채취하여, 그 냄새를 향기로 표현하였다. 고대 문헌을 보면 청각채, 소금, 개펄의 흙, 황토, 조개껍데기 등을 향재로 사용하였음을 기록했다. 이는 동양 향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다양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다만 그 맥이 현재까지 이어져오지 못하고 역사 속에 묻혀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자연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이곳의 냄새를 만들어보고 싶다.     

 왕포 마을에서 나와 늦은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신작로를 걷는다. 따가운 햇볕이 내 얼굴을 쏘아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작은 땅이 소리 없이 내 온몸을 감싸, 그 향기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내 영혼은 개펄 냄새를 따라 끝없이 항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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