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춰준다는 것에 대해서
"커피 좋아해요?"
"그냥 먹어요."
"산미 있는 거 좋아해요, 쓴 거 좋아해요?"
"저 고소한 거. 부드러운 거."
"오호."
"산미 좋아하는 사람 많던데 전 잘 모르겠어요. 커알못이라."
"저도 산미 싫어해요."
"다행이네요... 진짜예요? 거짓말 같아."
"왜 다 거짓말이라고... 타인 부정? 타인 불신?"
"맞춰주는 것 같잖아. 나한테."
그는 나와 통할 때마다 내가 맞춰주는 것 아닌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한다.
이전 여자친구와의 이별의 과정 중, "당신에게 맞추느라 연기한 내 삶을 변상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맞추는 당신의 연인의 자리가 부담스럽다"라고 들었던 것이 적잖은 충격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어이없는 것 까지도 내가 그에게 맞춰주려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품는 것 같다.
내가 굳이? 자의식 과잉 아닌가? 싶다가도 한 편으로, 지금이라면 그에게 뭐든 맞춰주고 싶은 마음도 있기에 입을 다물었다.
연애하는 기간, 우리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든 어느 정도 맞춰준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인격체의 특징을 상정하고 그에 맞춰 자신을 연기한다.
정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내가 상상하고 있는 인격체에 걸맞은지는 모른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이 닮은 사람에게, 동조해 주는 사람에게 좀 더 마음이 간다는 호감의 원칙에 따라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나는 호불호가 명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나를 색으로 나타낸 다면 그게 어떤 색이든, 아주 선명한 채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난 절대 회색분자와 같은 종족이 아니다.
그와 다르게 나는 커피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국제 바리스타 자격증도 딸만큼 관심도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먹었던 커피 중에 가장 맛있었던 것은 시험장에서 라테아트를 시연하기 위해 스스로 내렸던 카푸치노다. 너무 맛있어서 시험관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다 마신 뒤에 시험을 진행했다.
향료를 눈 감고 맞추는 훈련도 받았었다.
이렇게 커피를 잘 아는 나는 단언해서 말한다. 산미 있는 커피는 별로다. 높은 고도에서 자라 풍부한 과일향과 아로마향이 퍼지는 가볍고 밝은 바디의 예가 체프, 에티오피아, 아라비카종 전부 별로다.
커피를 마신다면 고소하고 신맛이 잘 나지 않는 브라질, 과테말라등 남미 원두가 차라리 낫다.
아니면 프렌치 로스팅 이상의 강한 로스팅을 하거나.
근데 애초에 나는 커피보단 홍차나 녹차류를 더 선호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면 또 어떤가?
굳이 일일이 맞춰줄 마음도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굳이 맞춰줘야 한다고 해도 그딴 걸론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뭐 어때?
백 개의 취향을 다 맞춘다고 그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백 개의 취향이 다르다고 해서 그가 실망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메서드 연기도 2년 이상 지속되면 그건 거의 그 사람의 인격체의 일부다.
맞춰줬다고 한들 그걸 오랜 시간 지속해나갔다고 한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이다.
맞춰줘서 얻으려고 했던 게 호감이든, 자신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든 그게 진실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겼기에 맞춰준 게 아닌가?
그렇다면 고작 그 정도의 주관이었을 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취향이었을 뿐이다.
그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공통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찰나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그까짓 취향은 수 백번이고 맞춰줄 수 있다.
왜냐면 내가 가장 강렬히 선호하는 것은 그 사람이니까.
커피든 뭐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맞춰준 것 또한 자신이다.
자신의 선택이다.
그가 맞춰달라 칼 들고 협박한 적도 없고, 협박했다 해도 그에 응할지 죽을지마저 자신의 선택이다.
"너에게 맞춰줘서 내가 희생당했다"라고 생각하는 건 참 편하다.
본인의 희생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핑계가 아닌가?
그런 사람에겐 사랑의 매 순간이 보상받아야 할 노동의 시간이 된다.
만약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주관이 있었다면 맞춰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책임은 맞춰준 상대가 아니라 어디까지가 타협선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귀 기울이지 않은 자신에게 있다.
사실 '맞춰준다'라는 표현도 맘에 들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책임을 내리고 타인에게 기여하는 척하는 것 같다.
맞춰'준다'라고 생각하면 내 불만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위임할 수 있다.
무언갈 줌으로써 감정적 보상을 얻고자 하는 심리가 합리화가 된다.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손해가 당신을 위한 나의 희생이라고 보란 듯이 표출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두려움, 분노, 그 모든 감정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
하지만 결국 감정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감정은 타인에게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내가 느낀 감정과 내가 취한 태도는 온전히 내가 선택한 것이다.
반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이다. 쉬운 길을 선택한 사람은 '너 때문에 힘들었다'라고 말한다. 핑계와 변명, 탓을 한다.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음에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피해자가 되어 자기 통제와 책임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노력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책임을 내려놓으면 아주 쉽게 불만이 생기게 된다. 나의 행복을 다른 상황,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하기 때문이다. 나의 통제력을 외부에 맡기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마저 부정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건강을 잃었다. 출퇴근이 5시간 이상 걸리고,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때도, 주말에 출근해야 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을 권위와 보상 없이 책임만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누가 만든 것인가?
날 충분히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 회사와 상사?
도와주지 않는 동료들?
아니면 날 말려주지 않은 부모님?
그들 때문에 회사의 바쁜 일정에 나를 희생하고 맞춰준 것인가?
아니, 내 삶의 질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나는 나를 이렇게 대했으면 안 됐다.
인정욕과 책임을 나의 존재 위에 둬선 안 됐다.
나에게는 바로잡을 기회와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나에게는 나의 삶에 대한 책임이 100% 있다.
나는 의식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고 선택한다.
나는 내 인생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하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맞춰 '주지' 않는다.
맞춘다.
내가 원해서 맞춘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방식으로 맞춘다.
가장 선호하는 것을 위해서 부차적인 것은 스스로 선택해서 맞춘다.
그 또한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요즘 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부분?
-> 어디서 책임을 내려놨을까?
-> 만약 그 장애물을 극복하려면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성장해야 할까?
-> 성장하고 이 장애물을 넘으려면 어떤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까?
->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내가 100% 진다면 5년 뒤에 나는 어떤 모습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