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수 밤편지

사랑을 시작한 순간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에 무뎌지지 않는 것
어떻게든 그 순간을 포착해 내는 것을 미루지 않을 것

그가 하는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것
그의 살냄새만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

무뎌지고 익숙해지는 것들에 새로움을 부여할 것
색다른 경험을 찾는 것에 게으르지 않을 것

이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배려하느라 불을 끄지 못하고 자신의 눈 위에 커다란 베개를 올려 빛을 가리며 잠든 당신을 보고 안타까움과 동시에 사랑스러운 감정이 마음에 일렁입니다..

잠들어 있는 당신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비록 불을 꺼버리는 바람에 어두워 당신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지만 오션뷰의 야경이 매우 잘 보이니 이것 또한 나쁘지 않네요.

달이 아름다운, 로맨틱한 밤입니다.


당신은 운전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번 여행을 위해 엄청나게 긴 시간을 운전했습니다.

몇 시간 내내 고생하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은 웃으며 말합니다.

"사랑해 주면 돼요."


저에게 바라는 것이 별로 없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 주어야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

당신이 받고자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어떤 방식이 당신을 치유하고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형태가 될 수 있을까요?

그걸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이 나였으면 합니다.


당신의 글, 당신의 표현, 당신이 호응하는 방식, 눈을 마주 바라볼 때의 표정, 갑자기 흥분하며 말할 때, 좋아하는 음악 취향, 팔에 있는 힘줄이나 근육의 모양, 책을 읽게 된 계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감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감명받는 모습, 과거의 상처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해 보는 습관, 무언가를 감상할 때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점, 줄곧 생각해 왔던 것에 확신을 가지고 말할 때에 느껴지는 섹시함, 끊임없이 스스로의 사고조차 의심하며 쉬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 맞춰준 게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모습,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전부 사랑스럽습니다.

정말로 여러 번 말하지만, 지금부터 보여줄 모든 것이 나의 취향과 정반대여도 이제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흔히 하는 착각에 빠져들고 맙니다.

이 사람은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들과는 정말 다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당신의 존재가 나를 위해 완벽히 예비된 선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런 착각.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흡족하게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옆에 존재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이번 여행을 통해, 당신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당신을 섣부르게 예측하고 내가 파악한 틀 안에 가둬놓아 더 이상 당신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함부로 당신을 재단하는 상황이 올까 두렵습니다.

때문에 당신을 알고 싶으면서, 알기가 두렵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기쁩니다.

동시에 당신이 내 끝사랑이 아니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 살면서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이 이상 사랑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겐 분명히 서로의 알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감출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미친 듯이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를 잊고 배은망덕하게도 서로의 몸이 그 어떤 흥분과 자극제도 되지 않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알몸을 내보일까 두렵습니다.


이 설렘은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우리가 서로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힘껏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서로의 곁을 지키고 싶도록 이끌어주는 조력자에 불과하겠죠.

분명 이렇게 설레는 순간은 끝이 올 테니, 그 안에 당신을 향한 다른 감정들을 쌓고 싶습니다.

그게 신뢰든, 정이든, 친밀감이든, 동질감이든, 애틋함이든 뭐든 좋습니다.

연약한 모습을 서로 안아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문에 잠들기 전, 야경을 바라보며 다짐하고자 이 글을 적습니다.

절대로 당신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