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백수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우당탕 취업 준비기 및 대학원 준비기
‘공모전 수상도 많이 해봤고, 대내외 활동도 몇 번 해봤고, 학점도 높은 이 내가 왜 빌빌거려야 해? 내 가치를 너무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이 재수 없는 믿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내가 생각을 고쳐먹게 된 시점을 정확히 말하자면 연이은 서류 탈락 고배를 마시고 나서부터였다.
내가 왜 빌빌거려야 하느냐고? 빌빌거려야 하는 실력이니까! 내 가치를 너무 못 알아보는 거 아니냐고? 알아봐 주길 바라기에는 너무나도 잘난 인재가 이 대한민국의 좁은 땅덩어리에 많이들 있으니까!
도대체가 신입 같지 않은 지원자들이 왜 이렇게 많단 말인가. 면접장에서 프로페셔널한 지원자들을 만나고 온 날에는 풀이 팍 죽곤 했다. 수십 개의 지원서를 넣고, 인·적성을 보러 다니고, 디자인 실기를 여러번 쳤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면접까지 가는 경우가 상반기 동안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다. 다 떨어진 것이다. 충격이 컸다. 이대로면 백수행 결정이었다.
내가 백수라니. 인사팀 양반... 아니, 인사 담당자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요?!
나는 어느 드라마의 인물처럼 절규했다. 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한 건 하반기 중순, 그러니까 10월을 향해갈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는 정규직 자리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단기 계약직이나 인턴, 심지어 정규직 전환형이 아닌 체험형 인턴 자리에도 지원서를 내밀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매주 탈락의 고배를 실컷 마셨다. 아주 배가 부를 정도였다.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취직을 못 하면 어쩌지, 고민이 많았다. 가뜩이나 중간에 휴학해서 나이가 마냥 어리지도 않았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학문에 큰 뜻이 없음에도 대학원에 지원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H대, K대, 그리고 우리 학교. 총 세 학교의 디자인 석사 전형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그중 가장 가고 싶었던 H대가 붙어 그곳에 가기로 했다. 적을 둘 곳이 생겼으니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업 준비를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연말까지 인·적성 시험과 면접을 번갈아 보고 다녔다. 설마 되겠나 싶으면서도 혹시 될 수도 있어, 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그리고 간절하게 취업 준비에 임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새해가 밝아왔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고 하반기 공채는 끝이 났다. 채용 공고가 더는 뜨지 않았다. 이로써 대학원행은 완전히 결정되었다. 안내된 기간에 따라 대학교 때보다 훨씬 비싼, 약 2배가량 높은 등록금을 H 대학원에 입금했다. 그랬더니 학번이 주어지고 학과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지도교수님을 선택했고 수강신청을 마쳤다. 이제 등교하기만 하면 됐다.
대학교 졸업식을 곧 앞둔, 그리고 대학원 입학식을 곧 앞둔 어느 2월의 날이었다. 봄을 향해가고 있지만 아직은 날씨가 겨울에 머무른 탓에 거리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뽀드득, 눈을 밟으며 학교 근처의 동네를 산책 삼아 걸었을 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올렸다. 화면이 켜니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축하합니다.]
미리 보기 창에 떠오른 첫 문장을 읽자마자 알아차렸다. 붙었구나. 드디어 붙은 거야.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메시지 함을 눌렀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메일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취업준비생활 1년 끝에 얻은 쾌거였다. ‘최종합격’, 그 단어가 내게도 오기를 그간 얼마나 학수고대해왔던가. 감격에 어려 꺅꺅,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던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붙은 회사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나는 전화를 건 상대가 눈앞에 있지도 않으면서 통화를 하는 동안 귀에 휴대폰을 꼿꼿이 붙인 채 허리와 고개를 연신 숙여댔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는 내 목소리에는 떨림이 들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내가 합격한 곳은 광고 대행사 B사였다. 그리고 내가 지원한 직무는 아트디렉터였다.
솔직히 시인하자면 광고는 잘 알지 못했다. 좋아도 하고 관심도 있지만 전문성이 부족했다. 디자인 전공이긴 하나 세부 전공은 광고 쪽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련 수업을 들은 적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다. 대학생 때 서너 번 참가했던 광고 공모전 활동이나 A사에서 근무하며 슬쩍 건드려봤던 마케팅 업무 경험이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의 전부였다. 더군다나 합격한 자리가 정규직이 아닌 체험형 인턴 자리였다. 때문에 계약 기간인 6개월이 끝난 뒤 다시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합격 통보를 받은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고 마음껏 기뻐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H 대학원을 자퇴했다. A사때의 교훈을 바탕 삼아서였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만큼 능숙한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면 B사였다. 보다 인턴 업무에 집중하고 싶었다.
올 봄부터 B사에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첫 출근날까지 2주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B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조사 겸 공부를 했다. B사의 이야기가 실린 뉴스를 훑어보고, B사의 직원이 썼다는 책도 사서 읽어보고, 잡플래닛(*회사 평점 사이트)에 들어가 B사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대체로 평이 좋았다. 복지도 좋고, 사내 분위기도 좋고, 배울 점도 많다고 적혀 있었다. 잡플래닛의 어떤 후기에서는 광고 업계에서 순위권에 들어있는 회사라고, 그래서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대행사라고 쓰여 있었다. 읽으면서 괜스레 내 어깨가 으쓱였다.
이 정도면 사회초년생으로서 꽤 성공적인 시작은 아닐까?
(비록 광고와는 무관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을 면접관들이 요령껏 알아준 것만 같았다. 나를 온전히 인정해준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내 능력이 나쁘지만은 않았구나, 라는 자부심도 얼핏 피어올랐다.
그래, 모든 건 다 좋아 보였다. B사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말이다.
인턴 생활을 3개월 정도 보낸 즈음이었을까.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만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애처럼 흐느끼는 나를 사람들이 흘끔댔다. 눈치가 보였고 창피했다. B사의 직원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찰나 스쳤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도착한 순간까지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입사 전에 가졌던 설렘은 사그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슬프게도 환상은 금방 깨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