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진우 Aug 12. 2022

9. 워낙 일 잘하잖아요

네? 제가요? / 두 번째 회사 : 광고회사 B사(6)

 7월, 완연한 여름이 왔다. 나는 4팀을 나가 다음 팀이자 마지막 팀인 제작 5팀으로 소속을 옮겼다.


제작 5팀은 지금까지 있던 팀 중에서 가장 인원수가 많은 팀이었다. 그래서 일이 적지 않을까 싶었지만 웬걸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지금까지의 팀 중에서 제일 업무량이 많았다! 팀원 수가 많은 만큼 PT 건을 빈번하게 받아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5팀에 온 첫 주부터 야근했다. 마지막 팀에서까지 일복이 넘치게 생겼다. B사 인턴 4개월 차는 이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새벽 택시를 익숙하게 불렀다.


철야 작업은 물론이고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주말 출근도 5팀에 오고 난 뒤로 하게 됐다. 다른 인턴 동기들이 나보고 괜찮냐고 자주 물어보았다. B사의 인턴이라면 빠짐없이 다 야근을 하기에 누가 누굴 챙겨주고 걱정해줄 만한 입장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안부를 물을 정도니 확실히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내가 바삐 지내기는 한 모양이었다.


5팀의 일이 많은 것도 있지만 실은 내가 자처해서 일을 더 늘리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획팀에게 전달받은 OT 브리프 종이를 붙들고 계속 훑어봤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어쩌다 가끔, 운 좋게 정시에 퇴근해도 쉬지를 않았다.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러프 콘티를 그리고 생각해둔 아이디어를 PPT에 정리했다. 자기 직전 침대 위에 누울 때는 예능 방송이 아니라 외국 광고를 감상했다. 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몽땅 광고에 투자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업무에 몰두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자꾸 신경 써주는 이가 있었다. 5팀의 아트님이었다.


그는 콜린 퍼스가 연기한 <킹스맨>의 해리 하트처럼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녔다. 내가 <킹스맨>을 좋아해서 그런지 그의 안경을 보자마자 해당 영화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해리 아트님(편의상 이리 명명하겠다)은 B사에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유형이었다. 그는 내 상사였지만 게다가 직급도 높았지만, 마치 나를 오래 알고 지낸 후배나 제자처럼 친근하게 대하였다.


내가 점심을 거르고 일을 하고 있으면 먹을거리를 건네주며 “쉬엄쉬엄해.”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내가 실수를 기어이 저지른 날에는 심하게 다그치기보다 “으이구.” 구수한 소리를 내면서 수습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아낌없이 도와주는 나무와도 같은 태도였다. 사실 내가 5팀에 처음 온 날부터 해리 아트님의 태도는 줄곧 그러했다. 5팀으로 자리를 옮기고 해리 아트님과 처음 만난 날, 그는 대뜸 선언하듯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인턴 좀 잘 챙겨줘야겠다."


다소 뜬금없지만, 호감 어린 말에 기분 나쁜 사람은 없으리라. 당시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울적함을 느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을 또 실망시킬까봐 두려웠다. 해리 아트님 얼굴 위로 4팀의 바 사수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빈말이겠거니 하며 해리 아트님 말을 일부러 한 귀로 흘러 버렸다.


그러나 그대로 흘러 보내 잊을 없도록 해리 아트님은 정말 나를 많이 그리고 잘 챙겨줬다. 나는 아트님의 챙김을 받을 때마다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그의 다정한 미소 이면에 무엇이 서려 있는지 파악하려 들었다. 지금은 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언젠가는 나를 몰아붙일 거라고,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내게 실망스럽다고 말할 거라고, 그런 생각들을 가지며 예의주시했다. 주머니 속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마음에 미리 단단한 무장을 쳤다.


그런 무장이 무색하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해리 아트님의 태도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칭찬과 조언만 더 늘 뿐이었다.


다그치지 않는 것만으로 나는 빳빳하게 굳은 자세를 풀 수 있었다. 날카로운 피드백 또는 강압적인 분위기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강인한 잡초 같은 부류는 아니었다. 충분한 물과 햇살이 주어져야만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는 부류였다.


 어느 순간,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전보다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회의 시간에 발표할 때 비판이 쏟아질 일이 더는 없었다. 도리어 내 아이디어가 뽑혀 광고주 제안서에 들어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역할도 새로이 주어졌다. 작가님께 발주 넣은 러프 콘티의 일부를 내가 그리게 된 것이다.


 “워낙 진우씨는 일 잘하잖아요.”


 언제 적, 5팀의 카피님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내 두 귀를 똑똑히 의심했다. 내가 함부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소리라도 들은 듯했다. 다시 말해 믿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희망이 눈치도 없이 빼곰 고개를 내밀고는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쓸모있는 인턴이 된 거 같지 않아? 라고.


 ‘그러지 말아야지.’, ‘자중해야지.’, ‘기분 탓이겠지.’


 내가 아이유도 아닌데 3단 콤보로 자신을 타일러보았다. 섣부른 생각을 가진 걸까 봐 걱정됐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는 확신이 들어서 있었다. 이건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해리 아트님을 포함한 5팀의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팀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 5팀은 지금까지의 팀 중에서 가장 업무가 많고, 그래서 미친 듯이 바쁜 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팀이었다. 어느 틈에 벌써 단단히 무장했던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지게 되었다. 난 조금씩 내 본래 모습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제안서에 넣었던 내 아이디어가 광고주로부터 최종 채택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광고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밤새 고안하며 짰던 내 아이디어가 바로 광고로 말이다.

이전 08화 8. 재직 중, 타사 면접을 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