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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진우 Aug 12. 2022

10. 나도 누군가의 용기가 되어야겠다

두 번째 회사 : 광고회사 B사(7)

 그 뒤로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출연 배우들이 최종 선정했다. 영상을 찍을 장소와 날짜도 정해졌다. 눈 깜짝할 새 정리됐고, 이제 촬영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네가 만든 광고잖아. 감상은 어때?”


 본격적인 촬영을 앞두기 전에 으레 하는 PPM(*광고 제작 전, 광고주와 제작사가 하는 최종 미팅)을 무사히 마친 뒤였다. 해리 아트님이 내게 슬쩍 물어봤다. 과분한 칭찬에 나는 그저 쑥스럽게 웃기만 했다. 정말이지, 과분했다.


아이디어의 단초는 내가 낸 게 맞지만 오롯이 내가 만든 광고라고는 할 수 없었다. B사 내부 회의뿐 아니라 프로덕션, 광고주와의 회의까지 거친 뒤 모두의 의견더해졌고 결국 메인 컨셉을 뺀 나머지 내용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업계 베테랑인 해리 아트님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이건 내 광고라고 치켜세워주었다.


 B사에 온 지 6개월이 다 되었다. 이 지옥 같던 인턴 생활이 언제 끝나나, 대체 끝나기나 하나 궁금했는데 어느새 결승점이 눈앞에 보였다.


 근무 마지막 주, 송별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5팀 사람들에게 수고했단 말을 넘치도록 들었다. B사를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너처럼 잘하는 인턴, 그동안 별로 본 적 없어.“

 “에이.”

 “진짜라니까.”


 4팀의 바 사수님이 전에 말했던 '너 같은 인턴 처음이야.'과는 비슷한 문장이지만 그 속뜻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겸손한 척을 그만두고 웃어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나오는 꾸밈없는 미소였다.


 그렇게 내 두 번째 회사 생활은 끝이 났다. 광고대행사 B사의 퇴사로 깨달은 건 많았다.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끝이 좋을지언정 어쨌거나) 나는 광고업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란 것이다.
실력만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다 잘 안 맞았다. 경쟁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과 그에 따라 요구되는 고된 근무 환경, 또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일정 등이 일절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뒤늦게 인지한 건데, 아무래도 나는 광고를 통해 창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광고를 왜 개인 고유의 예술 창작물처럼 여겼던 걸까. 광고를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과 내부인의 시선이 다르다는 점을 인턴 생활의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하면서도 꽤 긴 시간 동안 외부인의 시선으로 일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깨달은 두 번째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은 단기간 내에 달라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밤을 새우든 일만 하든 아무리 노력을 쏟아 부어도 말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우선 난 그러했다.) 중견기업 면접 직후 치밀었던 오기는 사실 분함과 닮아 있었다. 나는 나보고 못하다는 사람들을 향해 약이 잔뜩 올라 있었다. 너희가 얼마나 잘났나 어디 두고 보자란 심경으로 미친 듯 광고에만 열중했지만 안타깝게도 인턴 초반이나 지금이나 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인턴 생활 초반의 평가와 마지막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달라지긴 했다. 그래서 마치 내가 혜안을 얻어 180도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관찰하니 도취를 걷어낸 본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였다.


그저 전보다 시야가 조금 넓어진 것뿐이었다. 광고를 전혀 몰랐던 시절에서 벗어나니, 외부인에서 내부인으로 관점을 옮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어떤 요소가 광고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지를 가를 정도의 식견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2개월 전 스스로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고란 무엇인지, 어떤 아이디어가 대체 좋은 건지, 왜 나는 좋은 광고인이 될 수 없는 건지.’


 진정한 성장을 이뤘다면 답을 다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수험 공부하듯이 매달려보아도 모르는 건 끝내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2개월 치의 이해만으로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는 거구나. 이것이 내가 깨달은 세 번째였다.


대단한 성장을 이루지도 않은 나를 어째서 해리 아트님은 다른 이들과는 유독 다르게 대해줬던 걸까? 짜증도 안 났을까? 회사는 학교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의 태도는 B사가 회사임을 잠깐 잊게 만들 정도였다.


 하나의 일화가 생각이 난다. 5팀으로 막 소속을 옮겼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는데 타팀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새로운 팀은 어떤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그는 물었다. 잇따라 누가 못되게 구는 사람은 없는지, 농담과 같은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해리 아트님 이야기를 꺼냈다. 아트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노라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잠시 내었다.


 “그 친구가 원래 좀 그렇지. 인턴 잘 챙겨주기로 유명하거든. 인턴계의 아이돌, 여전하네.”


 그의 미소에는 비웃음이 들어있지는 않았으나 신비로운 전래 동화라도 들은 것처럼 감탄이 섞여 있었다. 그 친구 참 유난이라니까, 라는 식의 생각도 읽혔다 하면 내 과민일까? 어쨌든 당시엔 그런 인상을 그로부터 받았다.


그 대화를 나눈 뒤로 해리 아트님한테 더욱 큰 감사함을 느꼈다. 매년 B사는 적지 않은 인턴들을 뽑고 있었고, 그래서 B사의 직원들은 인턴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무감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정 기간에만 회사에 짧게 머무르다 사라질 이들을 향해서 꾸준하게 관심과 공감을 가지기는 어려울 터. 나 같아도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B사 직원과 나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경계선을 분명히 납득했다.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구나. 그 선은 마치 레이저 선처럼 부시고 강렬하여 나의 하찮은 분투는 어쩔 수 없이 홀로 명멸하고 있구나.


하지만 해리 아트님은 달랐다. 그는 나를 선 바깥의 인물로만 보지 않았다. 나를 그저 나로서 바라봐주었다. 진심으로 이해해주고자 노력했다. 어리숙하고 부족하고 실패도 많고, 하지만 열심히 하려는 한 팀원으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B사에서 남은 2개월 동안 경계선 앞으로 성큼 내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난 6개월간의 B사 생활은 광고보다도 사람에 대해 더 배워보는 시간이었다. 사람 때문에 울고 웃던 나날들. 계약 기간 절반가량을 울면서 지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것만으로 이 6개월에 의미는 생겼다.



광고대행사 B사 인턴 후기

한 줄 평 :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용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변식당 ***** (맛있는 식당이 많았다.)

-시설 **** (두려워했지만, 회의실이 좋긴 했다.)

-복지 * (A사 때보다도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야근 수당.)

-장비 **** (불편함 없이 잘 작업했다.)

-사내 분위기 채점 불가 (채점하기 어렵다. 내 인턴 생활은 극과 극을 달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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