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는 기다림이 일상이었다.
딸아이 어린이집 원장님을 뵙기 위해서는 출근 요일과 근무 시간을 필히 확인한 후 방문해야 했다. 전일제보다는 3일제 2일제 근무와 반일 근무가 많다. 어린이집은 7시부터 시작되고 4시면 퇴근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픽업했다(이런 유연함이 출산율 제고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논문을 쓴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클로디아 골딘이 202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덕분에 모든 일정이 한 뼘은 여유로웠다.
저녁 8시면 불이 꺼지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고요한 밤 8시에 슈퍼마켓에 갔다가 아이와 함께 있는 우리에게 지나가던 호주 할머니께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신 적도 있다. '아기가 자야 할 시간에 나다니는 이 고약한 부모들!!' 깜짝 놀라 눈물을 쏙 뺄 화통삶은 호통이었다.
그렇게나 여유롭고 지루한 날들이었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면 바리스타 상을 받았다는 커피집에 들러 까페라떼를 한 잔 사마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꿀만한 생활이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다. 바쁜 일상 속에 한 번씩 찾아오는 꿀맛 같은 휴식과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는 다르다. 느리게 가는 시간들이 짓이겨져 힘을 잃고 푹푹 쓰러지고 찐득찐득해진다. 적어도 내게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시간들 속에서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회사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생각들을 하며 멍하니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엄마 무슨 일 있어?' 퀭한 생각으로 밥을 하다 문득 바라본 딸 눈이 걱정스럽다. 어린아이가 저런 눈을 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몇 바퀴 돌고 돌아 살피는 물음이었다. 나 무슨 일 있나?
아이의 장난기 가득 빛나던 까만 조약돌 눈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함께 내리막길을 걸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먹물이 묻은 붓을 깨끗하게 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두었더니 어느새 새하얀 한지에 번져가듯. 빛나고 밝은 것들로 가득 차야 할 아이의 새하얀 도화지에 아무렇게나 둔 붓이 먹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다.
너는 나를 그대로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아이를 위한다고 보란 듯이 휴직신청을 하고 와놓고선, 돌아선 길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훈계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는 딸을 그리워하고, 호주에서 딸과 함께하면서는 회사를 그리워했다.
바보. 미국에서는 스스로를 위한 시간에 감사하고, 호주에서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감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것들이 드디어 눈앞에 있는 순간에는 두고 온 것들을 그리며 지내는 어리석음.
아이를 위해서 온 곳에서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마주친 아이의 눈에서 깨달았다.
딸을 위해서라며 희생하는 선택을 한 것만으로 내 역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삶은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자주 한다.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