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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Oct 21. 2023

내 눈에서 크는 너를 봅니다

눈물 콧물 다 짜고 돌아온 한국이었다.


남편 유학시험은 2년 동안 통과되기가 쉽지 않았다. (그 회사에 왜 그렇게 능력자가 많은지. 지금 돌아보면 예측가능한 당연한 결과지만) 그러다 내가 한국에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호주로 1년간 파견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같이 살게 되었는데 호주라니. 미국에서 홀로 지내며 겪은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내가 갚아야 하는 순서였다. 고생하다 떠나는 외국 파견길에 소중한 공동체원 혼자 덜렁 보낼 수는 없었다. 2년여 동안 한국에서 처갓댁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며 딸아이를 혼자 오롯이 돌본 (친정부모님께서 9할을 하셨지만) 소중한 가족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가.


의리 하나로 함께 가기로 했다. 나를 바라보는 회사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껏 희생한(처음은 비록 남편의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갓 돌 지난 아이를 안고 한국에서 덩그러니 보냈던 2년여는 한 아이의 일생에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후 3년이다.)  가족 공동체원들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머릿속 답은 명확했지만, 그 과정을 걷는 마음은  가시밭길이었다. 본청이 있는 세종에 육아휴직 사실을 알리고 온 날, 도통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 말에 따르면 울고불고 난리 난리 생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그날 밤에 그가 회사에 전화를 해 파견 포기가 가능한지 문의했다. 전화기 건너편 선배(그토록 점잖고 착하기로 유명하다는)님께서 당황했으나 애써 태연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 부처 T.O가 사라지는 조건 하에.


그렇게 우리는 다시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단 결정된 이상 호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비자만 통과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으므로.(비자 수수료를 아낀다고 혼자서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만행을 벌였지만 다행히 비행기 출국 전에 비자를 받았다.)


정신없는 일상에 준비라는 것을 할 여유는 없었다. 집은 구하지 않았다. 세 식구를 이끌고 남편이 다닐 대학교 근처 모텔에서 며칠 동안 지내기로 했다. 그곳에 기거하며 일 년 동안 지낼 집을 찾았다. 딸이 다닐 어린이집도 확정된 곳은 없었다. 모든 것은 호주에서 찾기로 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좋은 집주인을 만났다. 공부하는 언니와 여동생이라고 했다. 먼 타국에서 어렵게 넘어와 생활하며 주택 소유자가 되었고, 그 주택을 우리에게 첫 임대까지 하게 되다니 감동적이지 않은가. 오래된 집이어서 그 지역 렌트비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었고,  방 2개, 화장실 1개에 작은 거실이 다였지만 무엇보다 테라스가 있고 그 테라스에 앉으면 넓은 공원이 펼쳐져 참 전망 좋은 깔끔한 집이었다(늘 준비가 부족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한참 걸어가는 길에 선물 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일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신은 있다.)


딸의 어린이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에서 먼 곳에 있는 2번의 어린이집을 거쳐 남편이 다니는 대학의 부설 어린이집 자리가 났다. 호주에서의 운전은 한국과 반대편으로 운행을 하게 되어있었지만 운전 자체가 겁나지는 않았다(통상 모르면 겁이 나지 않고 나는 대체로 겁이 없다.)


다만, 역주행을 한 번하고서 가족 수칙상 아이를 동행하는 운전이 금지되었다. 무심한 데다 용감하기까지 한 나를 피해 다녀야 할 거리의 이웃들에게 위험한 내 차를 거두어주기로 하고 호주에서의 운전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중고 자전거를 하나 구했다. 아이를 태우고 다닐 거치대를 얹고 우리 둘은 헬맷을 쓰고 자전거 위에 앉아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어린이집까지 갔다 오기를 반복했다. 묵직한 아이를 뒤에 태우고 오며 내 나름의 쓸모를 느끼고 아이의 온기를 느끼는 일은 행복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자전거에서 내릴 때 까지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두고 나오는 길은 가슴을 후벼 파고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일이었다. 너덜너덜한 마음을 아이가 알아채고, 애틋한 눈빛을 보내는데. 어떻게든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 너무 괴로울 지경에 이르러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두고 오면 물먹은 솜마냥 축 처져 있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학교 가는 길에 차로 아이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남편의 통원은 아주 손쉬웠다. 안녕~하고 돌아서면 아이도 안녕~하고 돌아선단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딸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곁을 맴돌다 억지로 돌아서야 하는데. 아주 쿨하게 아이들이 노는 곳으로 뛰어간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하루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물었다.

"네가 떠난 뒤 키티가 어떻게 노는지 알아?"


필경 영어도 한 마디 못하는 아이가 제대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아 그 물음만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키티는 정말 활발해. 아이들을 주도하고 재미있는 놀이들을 제안해. 너랑 함께 있을 때와 네가 가고 나서의 키티는 완전 다른 사람이야."


허탈함과 기분 좋은 배신감.




아이는 내 눈을 통해 세상과 스스로를 바라본다. 내가 아이를 애처롭게 보면 아이는 본인이 애처로운 상황에 처해있구나 생각한다.


아이 아빠처럼 그저 당연한 일상인 듯. 안녕~~ 하고 쿨하게 돌아서면, 아이도 안녕~~ 하고 스스로를 믿는 마음으로 돌아서 친구들에게 간다. 아이가 불필요하게 힘든 마음을 안고 살아가게 할 필요가 없다.


내 눈에 그 마음을 담기로 했다. 너를 믿는 마음. 너는 잘 크고 있고, 잘 커갈 것을 믿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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