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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율의 독서 Apr 05. 2023

<태평양 전쟁의 한국인들>.

"우리가 잊고 있는 전쟁" 

양승하 씨의 고향은 전라남도 영광이다. 먹고 살기 위해 함경도에 있는 제철소에서 노동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서태평양에 있는 티니안 섬으로 이민을 갔다. 그가 함경도로 갔을 때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었고, 서태평양으로 갔을 때 아시아는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가 티니안 섬에 도착한 해는 1936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티니안은 일본이 위임 통치하던 섬이었고, 사이판과 함께 제당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일본은 부족한 노동자를 한국인으로 채웠고 그렇게 티니안 섬으로 갔던 이들 가운데 양승하 씨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일본이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1941년 12월 7일이었다. "진주만에는 미국의 육군, 해군, 해병 병력과 설비가 주둔해" 있었는데, 일본의 공습으로 기지에 정박 중이던 "8척의 미군 전함이" 피격 당했고 이 가운데 5척이 완파되었다. "군 관련자는 2,330여 명이 사망했고 1,145명이 부상" 당했으며 민간인도 100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거리를 두던 미국은 즉각 참전을 결정했고 진주만 공습 하루 뒤인 12월 8일에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와 함께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은 일본 해군 전력이 무너져 내린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진주만에서 일본에 기습을 당한 미국은 "전함, 전투기 수를 증가하는 데 집중"했고, "일본 본토에 최대한 근접해 대규모 전략적 공습을 개시하고 잠수함으로 본토를 차단한 후, 필요하다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데 전략을 맞췄다. 미군의 공습으로 "산업 기지와 기술적 전략, 조종사 훈련 제도, 해군 자원이 마비된 일본은" 이때를 기점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며, 승기를 잡은 미군은 더 왼쪽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일본 본토에 다다르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끝은 두 발의 원자 폭탄이 이끌었다. 이오지마 섬과 오키나와 섬까지 점령한 미군은 일본에 항복을 권했으나 일본군은 결사 항전을 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결을 전술의 도구로 쓰기도 했다. 종전을 위해서는 더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일본 본토에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고, 티니안 섬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한 발, 8월 9일 나가사키에 한 발을 각각 폭격했다. 일본은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에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 함으로써 전쟁은 마침내 끝나게 된다. 


전라도 영광 사람 양승하 씨는 서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태평양 전쟁을 겪었다. "일본군과 미군이 전투를 벌이던 당시, 그는 동료와 함께 동굴에 숨어 몸을 피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물과 빵나무 열매를 먹으며" 겨우겨우 버텼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행히 사탕수수밭 관리자가 되었고 미군으로부터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양승하 씨는 이민을 간 지 1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곳에 왔던 한국인 대부분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낯선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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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조르즈 레트리아, <전쟁>. 202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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