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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기 Jul 02. 2024

땀의 이유

들고 있던 상자를 툭 떨구고 말았다. 고작 A4 용지 한 박스 옮기다 쥐가 나다니. 이거 들었다고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혔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래 봬도 한때는 힘깨나 쓰는 사람이었다. 대학 축제 때 주점에서 쓸 소주를 궤짝으로 들고 다녔다. 교내 팔씨름 대회에서 이겨 가습기를 경품으로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과거의 영광은 흔적조차 없다. 쥐가 난 팔을 주무르자 물컹한 살만 잡힌다. 근육은 살 속에 다 녹아버린 모양이다. 앙상한 팔에 배만 볼록 나온 것이 영락없는 외계인 이티(E.T.)다. 영화 속 이티는 자전거라도 잘 탔으니 내 체력보단 나을 것이다. 지금의 난 팔랑이는 종이인형 수준이었다.


뭐라도 시원한 것 좀 마셔야겠다 싶어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쓸데없이 흘러나온 땀도 바람에 날려버릴 참이었다. 힘 빠진 팔을 휘적이며 걸어가는데 가로수 사이 걸린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파란 글씨로 ‘점심시간 30분 짬 PT’라 쓰여있었다. 홀린 듯 현수막 앞에 멈춰 섰다. 자세히 보니 직장인이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운동할 수 있도록 마련한 프로그램이란 뜻이었다. 30분이라면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몇 번 배우고 나면 A4 용지 한 박스쯤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지 않을까. 근본 없는 자신감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찾아간 체육관에는 직장인들로 빼곡했다. 점심도 미룬 채 운동에 열중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으며 바벨 앞에 섰다. 트레이너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바벨에 달려있던 무거운 원판을 모조리 빼버렸다. 내겐 원판도 사치라는 뜻이다. 그리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덩그러니 남은 봉을 손에 쥐여줬다. 첫날이니 가볍게 봉만 들었다 내렸다 하며 자세를 잡아보자고 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존심이 구겨졌다. 이 정도야 가볍게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갈리는 건 내 몸이었다. 열 번도 들지 않은 것 같은데 어깨부터 등까지 뻐근했다. 중심을 잡고 서있는 두 다리도 후들거렸다. 봉 하나에 쩔쩔매고 있었다. 내 체력이 이렇게까지 바닥이었나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입사한 후 내 몸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었던가. 밥때는 귀신같이 챙기면서 몸을 단련할 여유는 주지 않았다. 근무 중에는 일에 치이고 사람에 질렸다가 퇴근 후에는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운동이라면 상사를 욕할 때 입 만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과, 침대에 누워 유튜브 볼 때 핸드폰을 들고 있던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바벨을 들 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일은 운동해야지, 모레는 꼭 해야지 하며 미뤄뒀던 땀이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왔다. 고작 30분 PT쯤이야 거뜬히 할 거라 여겼던 내 오만을 원망했다.  


옷소매를 쭉 늘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후드득 닦아냈다. 양쪽 소매가 전부 흥건히 젖었다. 트레이너는 땀이 얼마나 귀한 건데 그걸 막 닦아내냐며 웃는다.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 온몸에 흐르는 땀방울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입꼬리를 씩 올리며 얘기했다. 운동을 하면 몸의 중심에서 체온이 끓어올라 땀이 난다. 피부 밖으로 나온 땀방울은 공기를 만나 증발하면서 체온을 낮춰준다. 쉽게 말해 열불 나 죽지 않도록 불길을 진화시켜 주는 역할인 것이다. 땀이 체온을 유지시켜 줌으로써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된다. 설명을 마친 트레이너는 마른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니 흐르는 땀 한 방울도 소중히 여기라고. 덕분에 살아있음을 감사하면서 말이다.


땀이 나도록 운동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말은 곧 내 안의 불길을 달래본 지도 오랜만이란 뜻이다. 일이 버거워도 다들 그러려니, 인간관계가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거니. 타오르는 불씨를 방관해 왔다. 그 사이 열기는 온몸으로 번져갔다.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갉아먹었다. 상자 하나 못 들었다고 스스로를 탓할 정도로 마음의 근육을 연소시켰다. 나는 육체를 단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면을 돌보는 일도 소홀했다. 흐르는 땀방울을 하찮게 여기는 건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불길을 달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짬에서 시작한 30분은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두 시간으로 늘어났다. 앙상했던 바벨 봉에는 원판이 하나 둘 추가되었다. 물컹하던 팔에 조금씩 근육이 드러났다. A4 용지 박스를 한 손으로 들겠다던 목표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에도 살이 붙었다. 고마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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