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센터에 갔다가 이유식 강의 포스터를 봤다. 일본 엄마의 이유 있는 이유식. 곧 이유식에 돌입할 때기도 하고 일본 엄마라면 새로운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홈페이지에서 신청했다.
강의 당일은 호우 경보 긴급 문자가 오고, 창문 밖에는 나뭇가지들과 종이 박스 따위가 날아다니는 날씨였다.
남편도 말리고 멀리서 엄마까지 카톡으로 가지 말라고 성화다. 하지만 오늘 외출을 못하면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게 되는걸. 양말을 바지 위로 올려 신고 후드티 위에 우비까지 갖춰 입은 후 집을 나섰다. 붕 떠서 날아다니는 주차 안내 표지판을 피해 가며 겨우 도착한 강의장에는 안내하는 직원을 제외하고는 나 밖에 없었다. 이러다 취소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쯤 두 명이 더 도착했고 사회자가 나와서 강의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세요, 일본에서 건너와 아기 키우는 엄마이자 요리 강사 사이토 치즈입니다.
치즈는 별명이 아니고 진짜 제 이름이에요. 작은 웃음으로 시작된 수업에서 또박또박 한국말로 사이토 상의 이유식 수업이 시작되었다. 가장 신기한 건 빵 우유죽이었다. 식빵을 잘게 찢어서 분유에 타서 먹이는 거였는데 간편한 방식이 마음에 쏙 들었다. 미음을 먹일 때 일주일에 며칠 정도는 빵 우유죽으로 대체해도 되고 일본에서는 흔한 방법이라고 한다.
강사와 진행 요원보다 수강생이 적었던 탓에 중간의 브레이크 타임은 오붓하게 다과를 나누는 티타임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자기 소개하고 이후 프로그램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 하세요?
주최하신 기획자 분이 물어오시는 데 갑자기 말이 막혔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곤란하게 느끼지 않았던 질문에 허를 찔린 기분. 아. 원래 회사 다니는데 얼마 전에 출산해서 지금은 휴직 중이에요. 하하. 단답형으로 끝나곤 했던 대답이 어색한 웃음과 필요 없는 설명으로 길어진다. 그러시구나. 추가 질문 없이 다른 사람에게로 질문은 넘어가고 이야기 꽃이 핀다.
아이를 기르다가 요리 강사로 교육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일본에서 요리학교를 나오고 한국인과 결혼해서 한국에 건너온 후 전업 주부로 아이를 키워온 사이토 상은 다누리 맘이라는 단체를 통해 강사 수업을 받고 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누리맘은 한국에 있는 외국인 엄마들이 각자의 배경을 살려서 요리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인데 대학생들이 만들어서 나름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한 학생들이고 멋진 엄마들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 알고 싶고 궁금한 것들은 광고에 나오는 크고 훌륭한 것보다는 이런 소소하고 실용적인 팁일 테니. 사이토상의 빵 우유죽처럼.
회사 울타리를 벗어나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아이를 기릅니다. 집안을 돌봅니다. 넷플릭스를 정주행 합니다. 라면을 기가 막히게 끓입니다. 나는 뭐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여러 회사를 다니면서 나쁘지 않은 소속도 가져봤지만 그런 건 다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더라. 휴직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십여 년의 회사 생활이 무색하게 나를 소개할 한 마디 말이 궁해졌다. 소속이 아닌 나의 일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바로 다들 말하는 직업이 아닌 일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구나 새삼 깨달아진다.
갑자기 웬 영어 공부야?
집에 도착해서 아기 우유를 먹이고 남편이 아기 목욕을 준비하는 사이 유튜브로 비즈니스 영어를 검색해서 틀었다. 역시 불안할 때는 영어 공부만 한 게 없다. 대한민국 모든 대학생 회사원들의 안식처 영어 공부. 결과는 없지만 현실의 불안에서 도피할 잠깐의 안식처. 미국인이 자주 쓰는 생활 영어 말고 회사와 직급 말고 나를 설명한 말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남은 일 년 동안 내가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