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모든 것은 우연하게 시작된다
#.23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졸업한지 5년 정도가 지나자, 주변 친구들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른 취업을 한 친구들은 직책을 달기 시작했고, 오래 준비했던 시험에 합격을 해서 큰 법인에 출근을 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심장이 뛰는 일을 찾아 멋지게 그 산업에 뛰어들기도 했고, 다른 이는 한국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정말로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진로를 잘 설정해서 앞으로 잘 나아가는 것만 같았고,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다섯 개의 명함을 손에 쥔 채 ‘나의 커리어는 이미 망한게 아닌가’ 따위의 생각만을 곱씹어대고 있었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언젠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만났던 문장이자, 한 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퇴사와 재취직을 반복하던 시절 핸드폰 배경화면에 써 두었던 인도 속담이다.
명확한 목적지를 가지고 하나의 기차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믿고 싶었다. 때로는 잘못 탔다고 생각했던 기차가 나를 예상치 못한 목적지로 데려가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20대의 끝자락. 나는 강남의 작은 꼬마 빌라, 그 중에서도 3층 끝에 있는 작은 사무실. 그 중에서도 출입문 바로 앞에 있는 책상에 앉아있었다. 코로나 시국 직전에 입사를 한터라 어찌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얼결에 새로운 기차를 탔지만, 이것이 잘못탄 기차라면, 심지어 이 기차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데려다 준다는 말은 내 마음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가 탄 기차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심리상담사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기관은 직원들의 대학원 진학을 장려하는 곳이었다. 일도 손에 익었겠다, 코로나로 퇴근 후에 별다른 것을 할 수 없겠다. 나는 여러 전공들을 기웃대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그곳에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시는 심리상담사가 계셨고, 소장님의 전공도 심리상담, 옆 자리 친한 선생님은 교육 상담을 전공하고 계셨다. 나의 업무는 상담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상담사들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심리상담이라는 분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원래부터 청소년 상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얼결에 심리상담 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심리 그리고 상담과는 전혀 관련 없는 전공과 이력이었으나, 나를 둘러싼 우연을 바탕으로 결국 심리상담사라는 여섯 번째 명함을 갖게 되었다.
물론 여기까지 들으면 이정도를 가지고 우연이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직장 역시 두 번째 직장에서 스쳐가듯 만났던 동료 선생님과 연말 안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아 근무를 하게 되었었고. 네번째 직장 역시 세번째 직장으로 힘들어하던 나에게 친구가 자신의 옆자리 직원이 퇴사를 한다며 알려준 공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어떠한 목적지를가지고 고속 직행 열차는 타지 못했지만, 수 많은 우연들 속에서 기차들을 옮겨타며 결국 심리상담, 진로 상담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로 상담에서는 이것을 ‘계획된 우연’이라고 말한다.
세계가 멸망한다던 1999년 스탬퍼드의 크럼볼츠(J. D, Krumboltz) 박사는 진로(커리어)에서 우연이 크게 작용하며,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에 따라 커리어가 발달할 수 있다는 ‘계획된 우연(Planned Happenstance Theory) 이론’을 발표했다.
크럼볼츠에 따르면 진로(커리어)를 아무리 잘 계획한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우연은 발생하며, 이를 기회로 만든다면 새로운 일을 발견하거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데려온다는 인도의 속담이 21세기인 지금도 유효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럼볼츠는 진로(커리어)에서 우연은 중요하지만 우연에만 기대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우연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연을 마주칠 확률을 높이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호기심’, ‘인내심’, ‘유연성’, ‘낙관성’, ‘모험감수’라는 다섯 가지 태도를 강조하는데, 그 중에서도 유연성과 낙관성은 예상치 못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좌절하기보다 유연하게 그 변화를 수용하며 다른 기회를 만들 것을 강조한다. 또한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전을 주저하기보다 모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며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기회와 우연을 높여보라고 조언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기차에 타고 있는가, 그 기차에서 무엇을 만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당신이 만나는 크고 작은 우연들을 현명하게 이용하며 당신만의 목적지를 잘 찾아나가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Krumboltz, J. D., & Worthington, R. L. 1999. “The school‐to‐work transition from a learning theory perspective.” The Career Development Quarterly Vol, 47, No. 4, 312-325.
Krumboltz, J. D. 2009. “The happenstance learning theory.” Journal of career assessment Vol, 17, No. 2, 135-154.
‘계획된 우연’ 이론
https://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5376
[계획된 우연 이론] 우연을 계획할 수 있다면
https://www.50plus.or.kr/detail.do?id=1402761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