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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만큼 땅만큼

by 단어

손목시계의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몸이 찌뿌둥하다. 군복을 챙겨 입고, 선크림도 잊지 않고 바른 뒤 점호를 하고, 휴가증을 받아 밖으로 나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 날이 바로 오늘이다. 목적지는 마산이 아닌 부산. 부산에 나를 기다리는 예진이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바로 마산으로 오지 않고 부산으로 간다고 조금 섭섭해하셨지만 이내 그게 맞는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엄마도 너무 보고 싶지만.... 엄마는 엄마의 사랑과 매일 함께하고 있으니 내 사랑을 찾아 떠나는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진이에게 출발했다고 카톡을 보내면 역시나 예진이는 깨어있다. 아직 내가 부산에 도착하려면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휴가를 나가거나, 외출을 나갈 때면 예진이는 언제나 아침부터 깨어 나를 기다린다. 만나서 신나게 놀려면 푹 자고 체력을 많이 보충해야 한다고 수없이 말해도 절대 듣지 않는다. 물론 나도 설레서 밤잠을 설친 건 마찬가지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잠들려고 노력해 봐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오늘 밤에 또 먼저 잠들면 예진이한테 한 소리 들을 텐데. 그때 몰려오는 잠은 나도 어떻게 이길 수가 없다. 잔뜩 섭섭해하는 예진이를 토닥거리며 "미아내.... 그런데 진짜 너무 피고내... 이런 부족한 나라서 미아내....."라고 말하며 스르륵 잠들면 예진이는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같이 잠이 든다. 아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어졌다. 이상하게 만날 날이 한 달 남았을 때보다 하루 전, 한시 간 전이 더 보고 싶다. 곧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더 보고 싶어진다.

귀에 들어오는 둥 마는 동하는 유튜브를 보고, 몇 번 졸고 나면 부산역에 도착한다. 내리자마자 예진이에게 전화를 건다. 정신없이 내리는 사람들 틈으로 상기된 목소리를 숨기며 예진이의 위치를 묻는다.

"나 이제 내렸어! 어디야? 부산역 엄청 크다...!!"

예진이는 상기된 목소리를 전혀 숨기지 않으며 답한다.

"너는 어딘데?? 앞에 보이는 가게 이름 말해봐 내가 찾아갈게!!"

이렇게 큰 부산역에서 너는 어디에 있을까. 마산역과 비교하며 몇 배는 큰 부산역의 크기를 감탄하고 있는데 네가 내 이름을 부른다.

"이수혁!!!!!"

오랜만에 보는 예진이는 여전히.... 작다. 작아도 정말 작다. 나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 속에서도 제일 작은 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감격의 포옹을 나눈 뒤, 예진이는 바로 가방이 무겁다며 투덜거린다.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예진이 백팩 속의 짐 대부분을 내 가방에 옮겨 담는다. 말로는 미안하다면서 얼굴은 한결 더 밝아진 너를 보며 얘는 대체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하는 걱정을 잠시 한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는 김예진. 매일 가는 길도 네이버 지도가 없으면 못 가는 김예진. 두 손이든 등이든 짐이 있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김예진. 다른 사람들은 알까. 예진이가 얼마나 까탈스럽고 투덜거리는지. 아니면 내 앞이라 더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내 앞에서만 그러든, 원래도 그런 성격이든 나는 언제나 예진이 옆에서 예진이의 짐을 든다. 나에게는 너의 짐이 그렇게까지 번거롭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짐을 들 때 네가 나를 보는 그 눈빛이 좋다. 멋있고 든든하다는 눈빛. 꽤나 만족스럽다는 눈빛.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멋있는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

예진이는 가끔, 아니 자주 묻곤 한다. 자기의 어디가 좋냐고.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냐고. 나는 백이면 백 이렇게 답한다.

"예진이는 예쁘잖아. 그리고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지!"

예진이는 백이면 백 이렇게 되묻는다.

"진짜 그게 다야? 그냥 예뻐서 좋아? 그리고 하늘만큼 땅만큼 말고오~~~ 다른 거 없어?? 노잼이야..."

정말인데. 정말 예뻐서 좋은 건데. 예쁘니까 짐도 들어주고 투정도 들어주고 다하는 건데. 물론 예진이가 언제나 예쁜 건 아니다. 세수하고 예진이 시그니처인 뿔테안경을 쓰고 나면 정말 다른 사람이 된다. 눈썹이 없어지고, 눈이 콩알만 해 진다. 눈썹과 안경의 유무가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나는 예진이를 만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웃긴 건 못생겼는데, 분명 못생겼는데 자꾸만 그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편한 옷을 입고 안경을 끼고 누워서 나와 전화하는 예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보다 예진이는 하늘과 땅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3박 4일의 휴가는 0.34초 같이 지나가더니, 6박 7일의 휴가는 0.067초 같이 지나가 버린다. 아무리 반복해도 헤어짐은 어렵다. 눈물을 글썽이는 예진이를 보는 일은 더 어렵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나도 같이 울 것 같아 애써 눈을 피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너의 짐을 들고서 같이 걷고 싶다. 그게 군대 복귀보다 백배, 아니 천 배 만 배는 더 행복할 것이다. 지하철역 앞에서 우리는 꼭 내일 볼 사람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렇게라도 웃으며 헤어져야 마음이 편하다. 너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가야 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너는 아마 모를 것이다. 너는 이번에는 안 울 거야!라고 힘차게 외치며 발걸음을 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애써 오므리는 너의 입술과 벌렁거리는 콧구멍이 나에게 알려준다. 네가 가는 길에 또 훌쩍거릴 것임을.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참으며 너에게 전화를 건다.

"김예진~~ 내가 다 보고 있다~~ 다른 남자가 말 거는지 안 거는지 다 감시하고 있다~~"

너는 피식 웃으며 내 장난에 맞장구를 친다.

"헐~~ 어떻게 알았지?? 나 방금 막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같이 키득거리며 그 밤을 흘려보낸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너를 생각한다. 키도, 손도, 얼굴도, 발도 다 작은 네가 나에게 주는 사랑을 생각한다. 새삼 놀라워진다. 그토록 작은 네가 어쩜 그렇게 나를 꽉 채울 수 있는지. 나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는 너는 결코 작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얼른 가서 또 전화를 걸어야겠다. 예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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