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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성 Sep 26. 2018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에 있어서 사람을 못 믿게 된 것도 있지만 나는 나 자신도 믿지 않는다. 매번 실수를 반복하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내가 하고 있는 경우도 여럿 봐왔기에 나, 그리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됐다.

‘믿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불편하게 인식된다. 뭔가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느껴진다. 성경에도 믿음, 소망, 사랑이라 했는데 사람에 있어서 믿음의 부재는 사회 부적응자라든가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에 변론을 하자면 엄밀하게 따져 나는 누구도 ‘확신’ 하지 않는다. 이 확신의 부재는 누군가와 관계를 이성적으로만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실수와 책임의 결여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보통 연애를 하고 감정이 짙어지면 결혼을 꿈꾸고 심지어 아이의 이름을 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주변에 그렇게 연애 초부터 결혼을 약속하고서 실제로 결혼을 한 사람을 한 명도 본 적 없다. 내가 어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나약한 사람은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내일도 당장 확신하지 못하는데 타인과 함께하는 미래를 확신하는 것은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연애를 하면서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봤다. 사람은 미래를 꿈꾸며 행복과 안정감을 느낀다. 별다를 것 없는 늦은 밤 경찰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두려움을 잊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얼마나 더없이 행복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피하고자 하는 것, 확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이 미래에 대한 과도한 확신으로 타인을 제한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난 너 아니면 결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넌 나 말고 다른 사람 절대 만나지 마.”, “난 너밖에 없으니까 그 모임 탈퇴하고 그때마다 나랑 놀자”, “난 네 친구 맘에 안 들어 만나지 마”등 이러한 말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그 사람과 함께할 것이고 책임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확신에 차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호재임을 확신하며 또 평생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아니, 당신은 그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지 확신하고 지금의 모습이 아닌 최악의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장래희망이 여러 번 바뀌었다. 경찰, 소방관, 요리사, 작가, 검사, 배우 등 내 장래희망이 여럿 바뀌었다고 그때의 동경심과 간절함이 직업의 수만큼이나 나뉘어 진건 아니다. 경찰을 꿈꿨을 때는 늦은 밤 혼자 다녀도 그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굳게 믿었고 나도 나중에는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소방관을 꿈꿨을 때는 저기 탈출하지 못한 어느 소년, 소녀를 내 목숨을 다해서 구출해내는 것을 늘 상상해왔다. 그렇게 여러 번의 동경심을 느끼고 때로는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경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여러 미래를 열렬히 꿈꿔왔기에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각 직업 아니, 각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감한다. 지금의 내가 예전에 꿈꿔왔던 것처럼 된 것은 아니지만 꿈꿔봤기에 지금의 내 삶이 누구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고 나의 어떤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내가 속해있는 어느 집단을 경멸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을 안다.     


결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과의 관계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타인을 제한하거나 시험한다. 나는 이것을 폭력으로 느낀다. 내가 경찰을 꿈꿔왔다고 소방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난 더욱 불을 두려워할 것이고, 배우를 꿈꿔왔다고 검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평생에 정의를 꿈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동경하는 삶이 변화된다고 내가 그 삶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난 그냥 변화되는 ‘나’로서 살아간 것이다. 내가 경찰을 꿈꾼다면서 내가 앞으로 행할 범죄에 있어서 쉽게 노출하지 않는 법을 찾으려 한다면 나의 삶이 거짓된 것이겠지만 경찰을 동경하다가 소방관을 동경한다고 경찰에게 보복을 당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연인이 열렬히 사랑하다 그중 한 명이 식물인간이 됐다고 한다면 남은 한 사람이 그 사람을 평생에 책임을 지는 것은 어찌 보면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고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사와 지인들, 가족들 등 여러 사람들이 그를 돌본다면 적어도 함께함에 외로움을 덜 느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의 삶을 제한해 그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 옆에 당신밖에 없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평생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하는 작업을 단순히 돌을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돌에 갇힌 천사를 구출해내는 작업으로 보았다. 나는 사랑한다면 대상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가두는 다른 것들로부터 그 대상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 그래서 종종 운명을 체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정해진 운명을 내가 알고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깨나 괴로울 것 같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텁텁한 우리에 갇혀서 당연히 내려올 음식과 물을 기대할 필요 없이 먹는 것에 안주할 수 있음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함 가운데에서 나름 미래를 꿈꾸며 지금의 감사와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당연하게 예견된 욕구를 기계적으로 충족하며 안주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이 있어서 지금의 가치를 느끼고 안정된 꿈을 꿀 때 감사를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면 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2018.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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