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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한겨레출판」

by 바람


종교인의 정신적이거나 금지된 사랑 이야기인가 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한 내용들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거지요. 우선권을 준다는 것은 우선권이 없는 모든 것들을 희생한다는 것이지요.’


베네딕도회 수도원 중 한 곳에 머물던 사람들의 생각, 믿음, 사랑들.

어느 모로 보나 우월한 미카엘, 천사 같은 안젤로, 부드러운 요한.

관념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세상 속의 약한 자들을 위하여 살고 싶어 하던 미카엘과 그의 옆에서 낮은 자세로 함께하던 안젤로가 사고로 죽은 후 요한은 마음을 가다듬지 못한다.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같이 떠나겠다 다짐했던 대상인 소희마저 그를 배신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신부가 된 요한에게 소희의 연락이 오고 그를 떠난 이유가 당시 아빠스신부(대수도원장)였던 삼촌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미 지나버린 마음과 세월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무교인 나의 심금을 울린 건 이런 미숙하고 나약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천주교 박해 못지않은 북한 공산주의 하의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가 너무나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런 끔찍한 일들을 당한 후 겨우 고국인 독일로 돌아갔지만 다시 한국으로 나와 신앙활동을 계속하던 토마스 신부와 베네딕도회 사제들.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6·25 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연합군들에 의하여 생명을 건진 요한의 할머니와 지원자가 없어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인 미국 수도원 신부의 인연도 크게 인상적이었다.


도움을 주었던 사람으로부터 다시 도움을 받게 되는 운명의 수레바퀴 같은 일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듯 한국 베네딕도회에서 미국의 그 수도원을 인수한다.


가슴이 떨린다. 신념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이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라도 알게 될 때마다.

곰배령의 가래나무 암꽃과 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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