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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새의 선물

-은희경 「문학동네」

by 바람


열두 살에 다 커버렸다는 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이다. 분명히 읽었던 소설인데 완전 새롭다.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을 모두 읽고 싶을 정도로 1회 수상작인 이 소설의 느낌이 강하다.


한 집에 사는 나, 이모, 할머니, 삼촌과 세 들어 사는 여러 집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때로는 감상적으로 그려진다.

신경숙의 ‘외딴 방’이나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이 생각난다.


열두 살의 진희는 엄마가 정신이상으로 자살한 뒤 할머니, 이모와 살게 된다.

그 시절을 액자 구성으로 그려 놓았다.

문득문득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진희와 그 주변의 인물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


가끔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아빠가 쓰러지던 여덟 살 때부터 세상에 냉소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며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오히려 마흔이 넘은 지금 내 안의 모순을 더 날카롭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진희는 세상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서 늘 성실한 자신을 의아해한다.

읽는 내내 나의 유년 시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컷 한컷 떠 올랐다 사라졌다.




마루에 엎어져 봄바람을 느끼며 순정만화 읽던 일.

마당의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아빠와 동네 아저씨들이 잡아 온 피라미로 매운탕과 튀김을 드시며 웃고 이야기하며 시끌벅적하던 일.

출근하시던 아침에 갑자기 쓰러져 반신불수로 힘겹게 걸으시던 아빠의 노곤한 모습.

아빠와 싸우고 뚝방 아래에서 소리 내어 우는 엄마를 찾아 같이 울던 셋째 언니와 나.

경매로 넘어간 집에서 그 집을 산 셋집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기어이 중학교 졸업 때까지 살던 엄마와 나.

대보름 날 골목대장과 동네 아이들과 함께 쥐불놀이와 횃불행진하던 나.

그들과 동네 산에 올라가 노래자랑하고 지우개를 상품으로 받았던 장면.

토마토 밭에서 서리하던 동네 아이들을 막기 위해 원두막에서 졸음과 모기를 쫓으며 지키던 일.

이젠 넘어간 그 밭 옆의 살구나무에서 살구를 따다가 새 주인에게 소리 듣는 셋째 언니와 나의 모습.

부엌방에서 둘째 언니가 내 이름을 한자로 쓰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

큰언니가 밤에 하늘의 별을 'star'라고 알려주며 내 손에 영어로 써 주던 것.

주말에 왔다가 전주 학교로 다시 가는 둘째 언니를 버스 밖에서 손 흔들며 배웅하고 그날 밤 언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나.

중학교 3학년 때 전주로 고입 시험 보고 온 내가 멀미로 토하고 잠들어 있는 사이 엄마가 머리맡에 귤을 한 봉지 놓고 다시 식당으로 일하러 가셨던 일.

왕년에 천재였다는 동네의 미친 아저씨가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던 모습.

이 소설 속 주인공이 할머니 안마하는 내용을 읽으며 킥킥 웃었는데 내가 아빠를 그렇게 안마하던 모습과 똑같다. 나 힘들까 봐 이제 그만해라 하시면 난 열 번 정도 최대한 잘 두드려 드렸는데 그게 시원하다 하시니 또 열 번 추가, 또 열 번 추가를 몇 번씩 하던 모습.

사람들이 개를 자루에 넣고 몽둥이로 두들겨 죽이던 장면.

이른 봄에 동네 친구들과 쑥을 캐는데 내 바구니가 거의 비어 있으니 동네 언니가 자기가 캔 쑥을 나누어 주던 것.

여름에 집 앞 강에서 다슬기 잡고 수영하고 나무에 올라타고 그 아래에서 돗자리 펴고 책 보고 누워 있는 장면.

그 좋은 곳에 도시에서 온 대학생들이 버너에 불 붙이다 폭발해서 피를 흘리며 업혀가는 모습.

한겨울에 얼어있는 문고리를 잡을 때 딱 붙어버리던 손가락의 느낌.

엄마가 연탄불에 끓여준 뜨거운 물을 섞어가며 머리 감던 어린 나.

대문에서 마당까지 가는 골목길 양 옆의 아빠가 심어 놓으신 채송화들.

마루에서 보던 꽃밭의 앵두나무, 작약, 봉선화, 딸기, 사철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방문을 떼어서 한지 창호지를 새로 붙이면서 문고리 옆에는 단풍나무 잎을 넣는 봄날의 아빠.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가졌던 느낌, 경험들과 비슷한 내용이 그려지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그걸 글로 써내는 소설가들의 재능에 기분 좋은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창덕궁의 앵도나무(앵두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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