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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너별 May 20. 2021

퇴사를 그저 축하해, 꽃과 함께

덧없는 너에 대한 마음


지리학자가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
"그런데, 너, 넌 멀리서 왔잖아! 너는 탐험가가 분명해! 네 별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니?"
"아, 제가 살던 별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아요. 제 별은 아주 작아요. 그리고 화산이 세 개 있어요. 제 별에는 꽃도 한 송이 있어요."
"꽃은 기록하지 않아."
"왜요? 꽃이 가장 예쁜걸요!"
"꽃은 덧없기 때문이야."
"덧없다는 게 무슨 의미예요?"

... (중략)...

"그건 '곧 사라질 위험이 있음'을 의미해."
'내 꽃은 덧없는 존재였구나. 내 꽃은 겨우 네 개의 가시로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켜 내야 해! 그런 꽃을 홀로 남겨 두고 왔다니!'
어린 왕자는 생각했다.

별을 떠나온 뒤 처음으로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中 


 꽃은 덧없어.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다는 뜻이야. 덧없다는 표현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어린 왕자라는 책을 읽게 된 후부터였을 거야. 여러 번역본에 쓰인 다른 유사 표현을 읽어 보았지만, 덧없다는 표현만 유독 기억에 남아. 그러한 일깨움을 전해 준 역자에게 나는 감사해. 어찌 보면 식물의 생식 기관에 불과한 꽃이 왜 사람들에게 그토록 아름다움과 예쁜 마음의 상징이 된 것인지 항상 의구심을 갖던 나에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적어도 그 힌트를 던져 주었으니까.

 머물러 있던 일터에서 벗어나는 게 축하할 일이냐 하면은 꼭 그렇지는 않지. 잘 되어야 진짜 멋있는 거고 축하받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축하를 받게 되었지. 그냥도 아니고 꽃으로. 수국이었어. 수국의 꽃말을 안 찾아볼 수 없네. 

 흰 수국의 꽃말 : "변심"


  꽃도 그냥 고른 게 아니구나. 시의성이 반영된 재치 있는 선물에 나는 경탄 섞인 미소를 금할 수 없었어.


 생화를 선물 받은 건 30년 가까이 살아가며 난생처음이었지. 꽃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 머릿속에 흐릿하게조차 남아 있을 법한 기억이 전무함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걸 알게 되었어. 줄기를 사선으로 자르고, 잎을 다듬고, 페트병의 표지를 뜯고, 조약돌 몇 개를 주워 페트병에 물과 함께 넣어 놓고, 볕이 들면서도 내가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창가에 두게 되었지. 두 겹의 미닫이 창 사이에 머물기 충분한 보금자리를, 매일 드나들며 손이 닿는 방 안에서 재발견하게 된 것은 참 행운이었어. 


그 옛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고작 창문을 여닫는 나의 몸짓에 따스한 생명력의 의미가 피어나게 된 거지. 창문을 닫으면 마치 온실처럼 머물러 있고, 창문을 열면 피부로 닿아 마주할 수 있는 너. 나의 수많은 감정에 세부 곁가지를 하나 추가할 수 있게 된 지금 순간이 이지러지는 그 날까지, 나는 애틋이 바라볼 거야. 시간이 지나도 이 기억의 귀퉁이 조각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거야. 



   산다는 건 나무 한 그루로 자라나는 거야.

 가장 큰 줄기가 생을 견뎌내게 하는 업이고, 곁가지는 삶을 바라보는 해상도. 잎은 과정. 꽃은 아름다움. 열매는 결실. 성과. 과실(果實)이라는 단어를 보면 맨 처음 한자를 만들어낸 사람도 열매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나 봐.

어찌 되었건 나는 키우던 나무를, 방치해 두었던 나무를 줄기부터 탄탄히 다시 자라나게 하리라 다짐했지.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생명의 흔적은 나의 곁을 곧 떠나가겠지만, 씨앗이 움트고 뿌리로부터 자라난 줄기가 있었기 때문에 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 꽃에, 열매에 집착하지 않되 기대해도 좋아. 왜냐면 너의 줄기를 보면 알잖아. 얼마나 튼튼하고 맵시 있게 뻗어나가고 있는지. 결국은 느낄 수 있어, 그 누구도 사랑하여 주지 않는 척박한 대지에서도 언젠가 품어 왔던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  


그러니까, 나는 그저 너에게 정성을 다할게. 그간 욕심내어 거두었던, 혹여 내 삶에 나타날 누군가를 위해 한없이 아껴 두었던 사랑을 너에게 나누어 줄게.  나의 줄기로부터 뿜어져 나올 기쁨의 축제를 상상하며 그것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널 돌볼게. 널 무관심으로 시들게 하지 않을게. 대수롭고 또 소중한 너를 애만지며, 마지막 날까지 너에게 작게나마 기울였던 마음으로, 어렴풋한 슬픔으로 마음이 동할 어떤 날을 난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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