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Sep 11. 2019

나의 독서 모임 이야기.

3. 발췌와 발제의 기준을 세우다.

사진: Photo by �� Claudio Schwarz | @purzlbaum on Unsplash


※  독서 모임의 진정한 가치는 모임 안에서 어떠한 가치 있는 생각들이 오고 갔느냐일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토양을 만들고 성장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필요하듯, 독서 모임 그 자체도 바로 그러한 지적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중요한 토양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독서 모임을 만들어 가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독서 모임 가이드」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의 독서 모임을 만들어 가면서 느꼈던 생각이나 경험들을 중심으로 적은 글입니다. 이러한 글을 쓴 까닭은 독서 모임을 새롭게 만드는 분에게는 여러 모임의 형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함에 있으며, 독서 모임 진행하거나 참여하고 계신 분은 자신과 같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봄으로써 공감을 하고 저처럼 자신의 독서 모임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의도는 이러한 몇 년간의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가치 있는 사고를 위한 독서 모임」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사고 활동에 관한 인상이나 느낌을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한 가지 바라는 점은 좋은 독서 모임을 만드는 방법보다도 좋은 독서 모임이 되기 위해 어떤 사고를 했는지를 들여다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독서뿐 아니라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을 해주셨으면 하는 게 제 작은 소망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이야기는 연재 중에 계속 수정되며 추가될 수 있습니다.)


1부 이야기 -「독서 모임을 접하다.」https://brunch.co.kr/@wringkle/115

2부 이야기 - 「독서 모임을 만들다.」https://brunch.co.kr/@wringkle/122




모임은 점점 안정되어 이제는 고정적으로 참여를 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발제를 어떤 식으로 할지에 대해서도 가닥이 잡혔다. 기존의 발제 방식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조사, 책이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연관되는 것들에 관한 조사, 일반적인 감상이나 평에 대한 질문이나 선정 도서의 일부를 발췌하여 이와 관련한 질문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점점 읽은 책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발제를 만드는 요령이 생기자, 책의 주제나 저자의 주장에 관하여 연상되는 다른 책들을 찾아 함께 발췌하고 질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수능의 언어영역형 배치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참여자들이 모임을 통해 접해보지 못했던 여러 책이나 이야기를 알고 가기를 원했고, 나 역시 읽어보았던 책이나 혹은 앞으로 읽을 책들을 들춰본다는 측면에서 복습이나 예습의 효과도 있었다.


독서 모임을 위한 발췌 및 발제문의 주요 구성

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조사
② 작가와 작품에 관하여 연관되는 것들에 관한 조사
③ 독서 후 느낀 점이나 평가에 관한 질문
④ 선정 도서에서 중요한 부분 등을 일부 발췌하여 질문
⑤ 다른 책의 특정 부분을 발췌하여 함께 엮은 뒤 질문


이를 위해서 일단은 선정 도서의 목차를 미리 보거나 책을 전반적으로 빠르게 훑어보면서 이와 관련된 책들을 서재나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첫째는 읽어본 책 중에서 연상이 되는 것이 있는지, 둘째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거나 대립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책이 있는지 셋째는 도서관이나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 연관되는 책들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중심으로 일단 책을 쌓아두었다. 그리고선 선정 도서를 읽으며 틈틈이 발제를 엮어 갔다. 


발제를 만들 때는 책을 읽어가며 틈틈이 군데군데 필기를 해두거나 포스트잇으로 떠오르는 질문이나 생각을 적고 붙여 둔 게 유용했다. 이렇게 해 두면 발제를 본격적으로 만들 때 미리 적어둔 질문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그와 관련된 책만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두께가 두껍거나 주제가 무거운 책들은 이러한 작업을 하여 책 전체가 전달하는 다양한 주제나 질문 중에서 모임에 필요한 것만을 간추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제를 염두에 두고 읽는 방식은 일반적인 책 읽기에서도 도움을 주었는데, 독서를 할 때부터 신중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빈 공간이나 포스트잇에 적어두는 질문이나 생각은 대체로 그 자체의 내용에 대한 생각이나 의문을 정리하거나 나에게 의미가 될 만한 것인가를 다루었는데, 좀 더 세분화하면 대체로 이러한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적어놓고 책의 측면에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두었다.


1)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가, 내가 모르고 있던 내용인가, 책의 주제에 핵심이 될 만한 지문인가? 
2) 주장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떠한가? 근거가 타당한가, 그것의 전달 방식은 어떠한가?
3) 책의 내용에 관계하여 떠오르는 경험이 있는가? 내용과 경험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4) 전달하는 가치나 기술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거나 미칠 것인가? 문제를 제시했다면 해결방안은?
5) 참고할만한 도서는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관련이 있는가? 읽으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나 질문은?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독서를 하면서 발제를 동시에 만들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독서를 마치고서 적어둔 것을 바탕으로 발제를 만들기도 했는데, 발제의 질이 무엇이 좀 더 나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다른 책에서 엮을 만한 소스를 찾는 방법은 주로 목차를 보며 관련이 있을 법한 부분을 찾던가, 목차를 보며 찾기 어려운 소설 등의 경우 주제에 따라 떠오르는 책들을 가져와 빠르게 훑어가면서 찾던가, 혹은 뒷부분의 색인이나 인터넷에서 관련이 있을 만한 키워드를 검색하여 나오는 책이나 발췌를 발견했다.

전자책으로 볼 때는 포스트잇이나 메모를 워드나 스크리브너(scrivener), 워크플로위(workflowy)와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발췌를 하고 그에 관한 질문이나 생각을 적어둔 뒤, 그 아래에 참조할 만한 책들을 간단히 적어두곤 했다. 관련 정보에 관하여 적합하다 싶은 책들은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주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책들을 적어두거나, 알만한 책들을 적어두거나 그마저도 떠오르지 않으면 도서 사이트나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여 등장하는 양서나 고전을 참고하여 적어두고 이후 발제 작업을 하면서 관련 부분을 훑고 발췌 작업을 했다. 이러한 메모 방식은 점차 전차책뿐 아니라 종이책에도 적용했는데, 검색 기능을 통해 자신이 적어둔 메모를 찾기 쉬울뿐더러 최종 완성을 할 발췌 ·발제문을 작업할 때에도 다시 옮겨 적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책에서 엮을 만한 소스를 찾는 방법

ⓐ 다른 책의 목차를 보고 관련이 있을 부분을 찾아본다.
ⓑ 소설 등에서 소스를 찾고자 할 땐, 선정 도서와 주제가 비슷한 책을 찾고 빠르게 전체적으로 훑어본다.
ⓒ 떠오르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책 뒷부분의 색인을 검색해 보거나 책에서 얻고자 하는 키워드를 인터넷이나 서점 사이트에서 검색하여 나오는 책이나 여러 분야의 발췌를 참고한다.


발췌 및 발제를 만들 때, 초기에는 한글이나 워드만 사용하다가 위의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 그 까닭은 카테고리 구분이 가능하고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으며 자동 저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발췌와 발제문의 초고에서부터 출력물로 제공할 때까지 가장 유용했던 것은 스크리브너(scrivener)였다. 기능들을 배워야 하고 양식에 맞게 세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한번 양식을 설정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어려움 없이 출력까지 일사천리로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함은 맞춤법이었는데 영문 프로그램이다 보니까 한글 맞춤법 기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맞춤법은 주로 인터넷의 맞춤법 검사기를 활용했다. 여하튼 이 프로그램은 활용도가 매우 뛰어나 PDF 등의 다른 파일 형태로 제공도 가능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기록물로 저장해 둘 때는 HWP 한글 파일로 변환해야만 했는데, 그 까닭은 초기에 이것을 주로 사용했으며, 스크리브너보다 범용적이라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열람과 편집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으로 최종 편집 및 기록물로 둘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으며 또한 약간의 번거로움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그 까닭은 어느 하나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워크플로위(workflowy)는 온라인에서는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으나 발췌와 발제문을 만들 때 타인에게 전달할 파일이나 출력물로서는 적절하지 않았다. 또한, 맞춤법을 고치는 기능 또한 없었다. 스크리브너(scrivener)는 초기 세팅의 번거로움을 제외한다면 압도적인 기능을 제공했지만, 마찬가지로 맞춤법 기능이 부족했다. 그리고 드롭 박스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개인 PC나 노트북이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편집하기 어려웠다. 한글이나 워드는 뛰어난 범용성과 더불어 드롭 박스로 연동해 놓으면 쉽게 작업할 수 있었으나 2018 버전 이전의 맞춤법 기능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리고 스크리브너나 워크플로위처럼 바인딩이나 발췌나 생각에 따라서 구분하여 볼 수 있는 기능 또한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연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맞춤법이나 오타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편집 요소였기에 이를 도와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반드시 연동해 사용하곤 했다. 그에 관한 대안으로는 인터넷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https://speller.cs.pusan.ac.kr/) 나 무료로 제공되던 오픈오피스 3.1 용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가 있었다. 순전히 맞춤법 검사의 편의성 때문에 옛날 버전인 오픈오피스 3.1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따금 프로그램 오류를 뿜어내기도 해서 책상을 심하게 두드리는 일이 간혹 있었다. 참고로 비교적 근래에 출시된 한글 2018 버전부터는 압도적 성능을 자랑하는 '인터넷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 기능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어 편리하지만, 독서 모임을 할 당시에는 그러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편집 툴의 선택 기준

① 범용적으로 편집 가능한가?
② 훌륭한 맞춤법 기능을 제공하는가?
③ 발췌와 발제 작업하기가 용이한가?
④ 어디서나 작업하기 수월하며 저장이 용이한가?
⑤ 파일로 만들거나 출력을 했을 때 깔끔한가?


이러한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게 없었고 공유 목적의 최종본은 HWP 파일로 제공하기로 했기 때문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 


ⓐ 스크리브너로 발제, 발췌 작성 →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 사이트 → 스크리브너에서 프린트물이나 PDF로 출력 → 기록물은 한글 파일에 복사 후 재편집
ⓑ 워크플로위로 발제, 발췌 작성 → Export 후 plain txt 복사 →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 사이트 → 한글 파일에 복사 후 재편집 및 저장 → 출력
ⓒ 한글 파일로 발제, 발췌 작성 →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 사이트 → 수정본 복사 후 한글에 붙여 넣기 → 한글 파일 편집 → 출력
ⓓ 오픈오피스 3.1로 발제, 발췌 작성 → 오픈오피스 3.1 용 맞춤법 검사기 사용 → 한글 파일에 복사 후 편집 및 저장 → 출력


만약 기록물을 한글 파일로 제공하는 게 아니고 맞춤법 기능이 그리 필요치 않다면 스크리브너가 편리하며, 발제나 발췌를 간단히 할 요량이면 한글이나 워드 자체에서 작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글이나 워드 라이선스조차 없다면 오픈오피스나 구글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오피스도 유용한 대안이다. 참고로 최근의 문서 작업에는 주로 에버노트를 사용하는데, 이때에도 발제나 발췌는 에버노트로 하고 맞춤법은 한글 2018버전을 활용, 최종 출력도 한글을 통해서 진행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만족하기란 어려우니,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에게 익숙한 쪽으로 사용하면 된다. 


선정 도서의 발췌와 더불어 엮을 다른 발췌들은 비단 책에서만 찾아서 엮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신문 기사나 사회 이슈, 시, 혹은 만화까지도 책의 발췌 부분과 질문에 적합하다고 싶은 것은 모조리 찾아 엮었다. 이러한 방식은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려 이따금 모임을 앞둔 며칠 전부터 날을 새서 발췌·발제문을 만들어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쉬운 방식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독서력의 성장이나 통찰력을 키우는 데 엄청나게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발제 방식으로 인하여 독서 모임은 진지하면서도 다른 모임과 차별화된 모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독서를 하며 여러 방식으로 해둔 기록은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발제문으로 완성되었다. 발제문의 기본 편집 방향은 『가치 있는 생각의 공유』라는 모토 아래에서 누구나 책을 읽지 않아도 참여 가능한 모임이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발제는 그 편집 방향처럼 모임 자체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고 책을 읽고 오지 않아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책을 읽은 사람에게는 다른 책이나 영역 간의 결합을 통해 좀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지문을 통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토론들은 모임의 또 다른 묘미이기도 했다.


이러한 독서 모임은 비단 앞서 언급한 발췌와 발제 위주의 방식으로만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차차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모임이 계속 진행되면서 자발적이며 고정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독서 모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서 모임 선정 도서에 따른  발제문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中

오늘 우리 앞에서 처형될 남자는 모종의 방식으로 그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비르케나우의 반역자들과 접촉하고 우리 수용소로 무기를 옮겼으며, 우리 수용소에서도 즉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 우리가 보는 앞에서 죽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이 외로운 죽음이, 그를 위해 마련된 인간의 죽음이, 그에게 치욕이 아닌 영광을 가져다 주리라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독일인의 연설이 끝나자 다시 처음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Habt ihr verstanden?”(알아들었나)
여기에 “야볼”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누굴까? 모두이자 아무도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우리들의 저주받은 체념이 하나의 형체를 부여받은 듯했다. 그것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변하기라도 한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할 사람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무기력과 복종의 두텁고 낡은 장막을 뚫고 들어와 우리들 내부에 살아남은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Kamaraden, ich bin der Letzte!”(동지들 내가 마지막이오)
비굴한 무리인 우리들 속에서 어떤 목소리, 어떤 신음 소리가 들렸다고, 동의의 신호들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구부정하게, 음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독일인이 명령을 할 때까지 모자를 벗지 않았다. 뚜껑문이 열렸고 남자의 몸이 무시무시하게 덜렁거렸다. 악대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는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전율하는 사람 앞으로 열을 지어 다시 행진했다.
교수대 밑에서 SS 대원들이 무심한 눈으로 지나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했다. 아주 훌륭하게. 지금 러시아인들이 올 수도 있다. 우리들 중 힘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힘이 있던 마지막 사람은 지금 우리들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 나머지 살마들은 교수용 밧줄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올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다만 노예들, 우리를 기다리는 무기력한 죽음에 어울리는 기운이 다 빠진 우리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당신들의 눈앞에 온순한 우리가 있다. 우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반란 행위도, 도전적인 말도, 심판의 눈길조차 없을 테니까. 
알베르토와 나는 다시 막사에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우리를 이토록 망가뜨린 이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남자는 강인한 남자였던 게 틀림없다. 우리들과는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우리는 망가지고 패배했다. 이 수용소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해도, 마침내 우리의 식량을 마련하는 법을 배우고 고된 노동과 추위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해도, 그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침대 위로 메나슈카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죽을 나누었고 배고픔이라는 일상적인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제는 수치심이 우리를 짓눌렀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27~229p.〉
"전 당신을 배신했어요." 그녀가 당돌하게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배신했어." 그가 말했다.
그녀는 또 한 번 혐오에 찬 표정으로 그를 힐끗 보았다.
"때때로." 그녀는 말했다. "그 사람들은 견딜 수 없게, 정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을 했어요. 그러면 할 수 없이 '저에겐 그러지 마세요. 딴 사람한테 하세요. 이러이러한 사람한테 말이에요'라고 말하게 돼요. 그리고 그 후엔 그 말은 속임수고, 고문을 멈추게 하느라고 그랬고,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해보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런 일이 벌어질 때는 진심이었던 거예요. 목숨을 구하려면 딴 방법이 없었고 단지 그 방법으로 목숨을 구하려 들어요. 그런 구문이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길 바라게 되지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자기만 모면하면 되는 거예요. 
"자기만 모면하면 되지." 그가 되풀이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그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전과 같을 순 없어요."
"그래." 그가 말했다. "전과 같을 수는 없지."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는 듯했다. 바람이 얇은 제복을 통과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갑자기 고통스러워졌다. 더구나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날씨가 차가웠다. 그녀는 지하철을 타야겠다며 일어섰다.
"우린 다시 만나야지." 그가 말했다.
"네." 그녀가 말했다. "우린 다시 만나야 해요."
그는 반걸음쯤 떨어져 그녀 뒤를 어물어물 따랐다. 두 사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실상 그녀는 그를 떨쳐버리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꼭 그와 나란히 걷지 않을 정도로 걸어갔다. 그는 지하철역까지 그녀와 동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추위 속에서 줄줄 따라가는 것이 별안간 싱겁고 참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의 감정은 줄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보다 밤나무 카페로 되돌아가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 카페가 이때만큼 매력적으로 여겨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 구석 자리가, 신문과 체스판이 있고 언제나 술을 따라주는 그곳이 그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페는 따뜻했다. 다음 순간, 전혀 우연만은 아니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끼어들어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결국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50미터쯤 가서 그는 뒤돌아보았다. 거리는 붐비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달려가는 여남은 사람 가운데 그녀가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뚱뚱하고 뻣뻣해진 몸뚱이를 뒤에서는 알아볼 수 없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는 진심이었던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도 그랬다.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도 진심으로 그러기를 원했었다. 그의 고통이 그녀에게 옮아가기를 원했었다. 〈조지 오웰, 1984, 360~361p. 문학동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발제
살아남은 자, 구조된 자에게 끊임없이 부여되는 수치심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일까요?


이전 07화 나의 독서 모임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