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을에서(2)
연재소설 - 그림자를 찾아서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저희는 이 마을을 떠나는 것입니까?”
“조만간 그렇게 될 걸세. 그전에 자네는 이 사람들에게 성상이 그대임을 말해야 하네.”
그날 저녁,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이미 나랑 가까워진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말했으므로 그 사람들을 통해 마을의 다른 이들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유상에게 말했었던 이곳이 자신에게는 무의식의 세계이며 나와 닮은 존재를 찾아서 이곳까지 온 이야기, 이곳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서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 나아가 저 성상의 모습이 나와 닮았다는 이야기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일부는 경악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일부는 고개를 돌려 성상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나의 무의식의 세계이지만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꺼낼 때는 잠시 이 말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한 노인은 이러한 말을 했다.
"자네는 지금 자네가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그저 이곳에 왔을 때 저 성상의 얼굴을 보았고 직감적으로 저 성상의 얼굴이 나를 따라 만들었다는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는 마치 현자와 같은 모습으로 앞에 있는 한 아이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자네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네. 단지 우리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두고 있을 뿐이야. 그것이 믿기지 않는 일일지라도 말이지. 사실, 우리에게는 어떤 계시가 존재하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상과 관련된 계시인 것입니까?"
"우리는 사실 이곳에 어떻게 처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이곳에 온 사람들, 그보다 더 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저 성상이 있던 시기에는 못 미치지. 단지 우리가 받은 계시는 저 성상의 주인이 언젠가 온다는 것이네. 그리고 그 주인은 여행자처럼 오게 될 테니, 그들에게 아낌없이 대접하고 그를 따르라고 했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진짜 성상의 주인이라는 말과 또 한편으로는 외부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다시 말을 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없지만,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네. 추위가 밀려올 때는 땔감을 나누었고 가뭄이 들 때는 서로 힘을 합쳐 대안을 마련했지. 그렇기에 자네가 아무리 성상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지금에 와서 우리가 모두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러나 이 여행에 자네를 따를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네.”
노인은 유상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상아. 너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어 했지? 지금이 그 기회인 것 같구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지만, 노인은 젊은이들이 남아 있어야 이곳을 지킬 수 있다면서 그를 막았다.
“우리는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나 어렴풋하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네. 그러나 이 세계가 실체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기억하는 이 세계를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바로 이곳이니까.”
그는 숨이 찬 지 숨을 고르고서 다시 이야기했다.
“우리는 가진 게 많지 않아도 결코 이곳에서 자유롭지 않다네. 때로는 이곳이 척박하고 다른 곳보다 살기가 어려운 곳일지라도 우리의 터전이기 때문이지. 자네는 자네의 존재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고 그랬지?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있게 되길 기도하겠네.”
고개를 들어 유상을 바라보았다. 항상 밝게 웃던 그의 얼굴에는 곧은 심지가 보이는 듯했고 어떻게든 흔들리는 눈을 다잡으려고 하는 듯했다. 새로운 세상을 떠난다는 기대감과 익숙한 생활을 버려야만 하는 두려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림자를 찾기 위해서 떠나고자 다짐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었으리라. 나는 유상을 비롯하여 이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게 되셨습니까?”
“우리도 원래부터 이곳의 정착민이 아니었다네. 사실 우리의 기억이 만들어진 최초의 공간은 저 사막일세.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멀리서도 보이는 성상과 불빛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세. 이 성상 덕분에 사막에서 떨지 않게 되었으니,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임은 분명하지. 그렇게 우리는 이곳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살아왔어. 우리에게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곳이 우리에게는 삶이며 중요할 뿐이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네. 그러나 그대에게는 중요하겠지."
모임이 끝나고 유상은 숙소로 향하는 나를 따라오며 이야기를 했다.
“어떤 계시를 받았다 하여 우리는 무작정 너를 따라야만 할까? 사실 네가 진짜 성상의 주인인지도 의문이야."
"나 역시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의식은 저것이 나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성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설령 계시가 맞다고 하더라도 쉽게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이미 정착된 삶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그 도전을 이겨낼 만한 힘이 없어.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이 터전에서 살아갈 뿐이지. 네가 이곳에 온 것은 분명 운명이라고 생각해.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고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의문들을 풀어주었으니까. 너의 말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이곳 외에도 혹시 우리가 존재하는 다른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너에게는 너만의 무의식의 세계로 보이겠지만 혹 그 세계 가운데 우리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야. 나의 여정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갖고서 시작할 거야. 나와 이곳에 사는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 너와 함께 여행하다 보면 무엇인가 답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혹시 그렇게 찾은 것들이 무의미하다면 어쩌지?”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유상을 데리고 가는 것조차 옳은 것인지 잘 몰랐다. 지금으로선 그저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믿고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나의 몸이면서도 내 의지 없이 움직이는 자율 신경들처럼 소유물이면서 동시에 소유물이 아니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림자를 찾아다니고 유상 역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나를 따라나서려고 하고 있었다. 의식이 결여된 세계에서 의식적인 행동이 이루어지는 아이러니를 느끼며 이것이 진정 정해진 운명인지, 우리의 의지인지 궁금했다.
'이들이 나를 따른다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낮에 유상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들이 나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이끌 힘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내가 바라는 것은 내 그림자만 찾아 무사히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곳에 올 이유도 없을뿐더러, 노인의 말에 놀라 도망쳐 버렸을 것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나는 이 세계로 오게 된 것일까? 진정 내 그림자만을 찾기 위해서일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곳에 온 까닭이 단지 내 그림자만을 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꿈을 꾸었다. 눈을 뜨니 부처상이 눈에 보였다.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부처상을 다듬었다. 아기는 아버지를 보자 기쁜 마음으로 웃었고 그에 반응하여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이번에는 네 어머니를 위한 상이니, 다음에는 너를 위한 상을 만들어줄게. 모두가 널 기억할 수 있도록…."
아기는 기쁜 듯 연신 박수를 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