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휴대폰 알람 소리가 이불 속에서 나직이 들려왔다. 잠결에 소리가 들려 깨보니 7시를 알리는 알람과 어디냐고 물어보는 상윤의 메시지였다. 잠시 절망감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부여잡고 스터디룸으로 갔다. 약속대로 커피를 살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될 것 같아서 스타벅스 앱으로 커피 쿠폰을 보냈다.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커피를 마셔도 피곤함이 사라지질 않았다. 전날에 일찍 자면 될 것이었지만, 그 약속은 매번 지켜지지를 않았다. 하루를 보내기가 아쉬운 듯 저녁만 되면 중독적으로 인터넷을 해댔다. 더 큰 문제는 그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왜 이런 삶이 반복될까? 컴퓨터를 꺼버리고 침대에 바로 눕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차라리 그 시간에 창조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런 유튜브에서 재가공한 방송을 다시 보는 것이 전부였다. 혹자는 늦게 자는 까닭 중 하나는 그날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나 역시 그러한 까닭인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하려 든다면, 뭔가 조금 더 보람찬 일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의 내 삶 가운데 정말 충실하면서도 즐거웠다 싶을 적이 있었나? 특히 저녁 시간을 멋지게 활용한 적은 언제인가? 문득 생각나는 것은 독서 모임의 발제를 위해서 틈틈이 책을 읽으며 충실히 여러 책에서 발췌하던 때였다. 그때는 단순히 하나의 책을 읽고 질문을 만들어 토론하기보다는 그와 관련되거나 혹은 읽은 책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함께 엮어 질문을 만들곤 했다. 이 작업은 상당한 시간과 관심이 필요했으며 제한된 시간 안에 완수하기 위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자료를 조사하고 컴퓨터로 입력했었다. 책을 엮고 질문을 만드는 일은 그때 당시에는 대단히 피곤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책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거나 서로 다른 현상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를 발견하는 법, 읽었던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됨에 따라 반복적으로 읽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공모전을 준비하던 때였다. 이는 몇 년간 진행하던 독서 모임에 비하면 일시적인 일이긴 했으나 마감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거의 날을 새다시피 노력을 했었다. 그 노력이 보상을 얻기도 또한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노력 자체로부터 얻은 게 많았던 것 같다. 끝으로는 우유배달을 했을 때였다. 보통 12시 이후부터 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는 12시에 시작하여 2시 안에 끝내곤 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된 상태로 곯아떨어지곤 했다. 어떤 일이 되었건 지금보다는 충실했으며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혹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다만, 피곤한 일이었으며 잘 해내야만 한다는 불안감도 다소 있었다.
삶에 적당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 귀중한 무기가 되곤 했다. 특히 마감 시간이 있는 것들은 때로는 날을 새야만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또한 값진 결과를 만들었다. 지금 내 삶에 마감 시간이 있는가? 자유는 자신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었지만, 동시에 나태할 수 있는 자유도 주었다. 마감 시간은 계속 이어져 오던 게 끝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죽음’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을 진정 아는 사람은 삶을 충실히 보내고자 한다.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를 반드시 끝내야만 할 시점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삶의 후회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녁 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가? 다시 독서 모임을 만들어볼까? 혹은 일을 할까? 자정 이후의 시간은 많은 사람이 취침하는 시간이므로 그 시간에 누군가와 함께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혼자서 하게 될 텐데, 그 시간마저 자신에게 고통을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우유부단함 속에서 그저 시간만 흘려보낼 수는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할 게 없다면 영어 복습이라도 해야만 했다.
오전 영어 모임이 끝나고 헬스장으로 바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간만에 후배 종은을 만났는데 그가 날 불러세우더니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을 했다. 말인즉, 자신이 고소당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달려가다가 살짝 부딪혀 넘어졌는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제대로 사과를 못 했다고 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아주머니께서 뒤를 쫓아 집과 누군지 알아내고서 고발했다고 했다.
그의 덩치나 190cm 가까이 나가는 키를 생각하면 충분히 위협적이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전치 몇 주의 진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어깨를 부딪쳤다고 형사 고소를 한 것은 다소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는 거의 울먹일 듯 말했지만, 나로서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측에 조언을 받아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받아본 상태로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다고 말했다.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아 큰 문제는 안 생길 것 같았으나, "네가 악한이 아니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 탄원서 같은 게 필요하면 써줄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폭력을 사용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만한 증거나 증인을 찾아보라는 말을 했다.
한쪽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사건이라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이것이 폭행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저 옆에 살짝 부딪혔다는 걸로 고소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상해를 입었다는 증거 자료 하나 없이 고소부터 검찰 조사까지 받아야 하는 게 억울할 만 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만약 이러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판단 기준으로 검찰과 경찰이 이와 같은 사건을 처리하는지 궁금했다. 법적인 폭력의 범위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폭력의 범위와 다른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폭력 사건으로 다루는 것은 최근의 이슈가 되는 여성 인권과 결부시켜 바라보는 것인가? 혹은 그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분쟁인가?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역시 아버지의 일로 하여금 법률적 지식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느끼는 상황에서 이러한 법에 관계된 일들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타바타로 빠르게 운동하고서 씻고 학교로 향했다. 커피숍은 작업하기에 최고의 장소였으나 학교의 공간도 충분히 그 기능을 했다. 학교는 축제여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밝아 보였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대학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봄의 싱그러움을 받아 저런 밝은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 아직 그 공간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나 그들이 맡는 공기와 내가 맡는 공기는 다른 것 같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처럼 저들처럼 지내기에는, "나는 너무 늙어버렸어."라고 고리타분한 말을 해댈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작년까지도 들지 않던 생각이었다. 작년과 올해의 나의 태도는 꽤 많이 달라졌다. 그게 스스로 만들어내는 굴레인지 나이가 듦에 따른 사람들의 그런 시각을 인식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거라곤, 대학 시절의 어린 사촌 동생들이 이제는 대학생 혹은 사회인이 되어 있었고 친구의 아기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며 내 후배들은 회사에서 새로운 직함을 달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어린 후배들이 대거 졸업해서 학교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만 혼자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나무처럼 늙어갔다. 해마다 지울 수 없는 나이테를 만들어가면서. 남들이 뭔가를 이뤄가는 동안 나는 아직도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만 꾸고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어떤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항상 인기 있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런 주인공으로 무대의 중앙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과거 내가 주인공으로 있던 모든 게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점차 배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웃고 있는 저 연인들이 주인공이라 느껴질수록 마음의 허전함도 더 커졌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주연이 아닌 조연이 되고 엑스트라가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거품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허무감과 함께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고독이 바로 고립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미술사 모임을 위해 책의 도판 이미지를 인터넷으로 수집하고 그것으로 프리젠테이션을 만들고 나서, 그 그림의 한 단면을 확대해본 적이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초원 위에서 성모가 중앙에 있고 포동포동한 아기 예수에게 아기 요한이 십자가를 건네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군데군데를 상세히 보려고 그림의 일부를 확대했을 때, 모니터로 비치는 그 그림 속의 한 단면에도 그 자체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법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확대하니 풍경은 중심이 되고 모니터는 오로지 단면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단면들이 모여 풍경이 되고 큰 그림이 되었다. 그는 하나의 단면마저도 대충 그리지 않았고 그마저도 시선을 가까이 둘 때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전체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되자. 자신이 담당하는 부분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자. 그거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그림을 확대하여 꼼꼼히 보는 사람처럼, 내 위치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나를 인정해주는 이가 올 테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 역시 많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열심히 살자. 인생의 마감일이 다 하기 전에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내 운명 안에 있을 거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