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이 May 30. 2024

화장대와 비움

 엄마가 되고 살림을 주된 직업으로 삼은 후 가장 간소해진 것은 화장품이다. 원래도 화려한 화장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부가 된 후로는 더욱 색조화장을 할 일이 별로 없다. 가끔은 결혼식도 있고, 중요한 약속도 있으니 마스카라나 아이라이너 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이런 제품을 쓸 일은 손에 꼽을 정도. 어쩌다 한 번을 위해 날마다 수많은 제품들을 안고 살아간다. 쌓이는 먼지를 닦고 화장품 하나하나를 옮겨 일일히 화장대 위를 닦으면서 말이다. 생각할수록 이건 비효율적이다 싶다.

 

 화장대 위에 있던 화장품들은 전부 수납장 안으로 넣어버렸다. 화장품이 나와있지 않으니 청소하기도 훨씬 수월하다. 매일 사용하는 기초제품과 머리빗은 아이가 학교에서 사용하던 노란 바구니를 사용해 한 곳에 모아두었고 작아서 분실되기 쉬운 아이브로우와 립밤류는 파우치에 넣어 바구에 담았다. 샤워를 하고 기초제품을 바를 때 바구니를 통째로 꺼내 바르고 다시 바구니 그대로 수납장에 넣는다. 먼지도 쌓이지 않고 깔끔하고 관리도 쉽다.


 사용빈도는 낮지만 없어서는 안될 팩, 쿠션, 머리끈, 파운데이션 등은 바구니 옆 빈 공간에 나란히 두고 역시나 굴러다니기 쉬운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뷰러, 섀도우 등 자주 쓰지 않는 색조화장품류는 파우치에 담아 따로 보관한다. 특별한 화장품 정리 도구함이 없어도 충분히 깔끔하게 쓸 수 있다. 남편과 아이 로션은 화장실 수납함에 두고 욕실에서 모두 바르고 나온다. 우리집에서 화장대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되었다. 



 덕분에 텅 비어있게 된 화장대 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했다. 의자를 가져다 놓고 책상으로 쓰는 방법도 생각해보고 책꽂이로 활용하는 방법, 노트북이나 태블릿 PC를 올려놓고 미디어룸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


 하지만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할까? 지금 이대로도 좋다. 미니멀에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우리 조상들이 동양화에서 즐겨 사용했다던 여백의 미도 느껴지는 듯 하다. 어설프게 감성 소품이랍시고 디퓨저나 조명, 꽃 따위도 가져다 놓지 않겠다. 나에게는 어차피 머지않아 쓰레기가 되버릴 거라는걸 이제는 안다. 이것이 전업주부 10년 차의 짭밥이다. 


 한가지 조심할 점. 이렇게 공간이 비어있으면 남편이나 아들이 호시탐탐 이곳을 노린다. 각종 잡동사니를 자연스럽게 하나, 둘 올려 놓기 시작한다. 방심하면 쓰레기장이 되는건 순식간이다. 경계해야 한다. 


 대중에게도 알려진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그의 저서 <공간의 미래>에서 아파트의 발코니가 사라짐으로 인해 제조업 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발코니로 사용하던 공간이 거실로 확장되면서 여유가 생긴 공간에 가전, 가구 등을 들여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조업에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공간이 젋어지면서 짐이 늘어난 것인지 짐이 늘어나 공간이 필요해진 것인지 정확한 인과관계는 없으나 일단 공간에는 무엇이라도 채우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싶다. 


 하지만 채우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비우는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만 '남긴다'는 뜻이다. 버려질 위기를 넘기고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더 소중한 법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 빈 공간을 한동안은 그냥 바라보며 지내고 싶다. 섣불리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대신 비워진 공간에 감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련다.  




이전 06화 현관청소와 설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