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라는 말조차
상대적인 거지만,
나는 세상의 잣대로 봤을 때
금수저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가 어느정도 큰 뒤부터
부모님은 늘 고된 노동을 하셨고,
방 3개짜리 집에서
삼남매가 자랐기 때문에
동생들에겐
제 몫의 방이 주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한평생을 남들 밥만
해주며 사셨지만,
정작 우리의 밥상은
용가리치킨, 같은 것들이
채우는 일이 잦았고,
K-장녀였던 나는
엄마를 대신해
간장계란밥을 한가득 비벼
동생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셋 중에
가장 공부에 욕심이 있었던 나는
보습학원, 예체능학원 들을
찍먹 정도는 했지만
동생들은 보습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을 다니는 게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IMF 즈음에는
분양받은 집에
입주해야 한다며
학원도 다 끊었었다.
가난하다, 고 하면 기만이지만
뭐랄까...
다 가질 수 없는 삶?
늘 선택해야 하는 삶.
그게 우리가족의 삶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일기장에는
그러한 삶 속에서도
우리를 산으로 들로,
서울랜드로 데리고 다니며
사랑을 부어준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유년시절의 결핍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도 하다.
(내 일기인데, 원본이 짱박혀있어
전에 비공인스타에 올려뒀던 걸 찾아냈다.)
이 일기를 적어내려갔던
초등학교 4학년의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육아를 하면서, 신기한 경험은
어린시절의 나를
불쑥불쑥 마주한다는 것이다.
친정엄마와 육아를 하면서
나는 이 문제에서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엄마가 반찬을 통 째로 꺼내놓고
드실 때마다,
아이들에게
비비고 떡갈비를 구워줄 때마다,
애써 덮어두었던
유년시절의 결핍이
훅- 올라오는 게 아닌가.
어디선가 본
가난한 집안 특징.jpg
같은 게
내 눈앞에서 상영되는 기분이라
늘 붙같이 화를 냈다.
"엄마! 반찬 좀 덜어먹어,
침 다 들어가고 뭐야."
"엄마! 가공식품 먹이면
아토피 생긴다니까?"
"찬밥 모으지말고 좀 버려!"
"싼 거 말고, 맛있는 걸 사라고."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겪은 결핍이
아이들에 묻지 않을까, 하는
불안.
그래서 늘 예민했다.
엄마는
유난인 애가,
애낳고 더 유난을 떤다고
진저리를 쳤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 채워지지 않았던
결핍들이, 망령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 뿐이다.
예쁜 옷, 신발,
비싼 방문수업과 교구,
어린이 뮤지컬 관람,
예쁜 사진들,
누군가에게는 '낭비'로
보일 수 있는
나의 행동들은
어린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뒤늦은 선물같은 것이었다.
오랜 결핍을 스스로
채워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 가장 큰 결핍이었던
'해맑음'.
아이들이 나와 친정엄마,
남편에게 둘러싸여
넘치게 사랑받고
근심없이 웃는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나 좋더라.
더이상 일을 하지 않고
내 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
늘 바빴던 아빠와는 달리
정시퇴근해 아이들과 눈을 맞춰주는
남편.
그리고
세상 근심따위 모른다는 듯
천진하게 웃는 나의 딸들.
"원이 없다는 게 이런거구나."
돌 때부터 두 돌때까지
우리가 온 몸을 갈아넣어
가정보육에 매달린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으나....
아이들의 성장을
매 순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점,
개인적으로는
내 스스로의 결핍을
마주하고, 치유할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