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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Apr 02. 2023

벽장

5화

    태경은 약속한 대로 일주일 뒤 같은 시간에 최면심리연구소에 방문했다. 연재는 한 주간 연습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태경은 주머니에서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훈련법 종이를 떠올렸다. 그럭저럭 할 만했다고 말했다. 이날도 연재는 바로 최면을 시작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연재가 말했다.


    “저도 독신이에요.”


    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에 담긴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작성한 질문지에 기혼 여부 질문이 있었고, 태경은 인쇄된 ‘기혼/미혼’ 글자 위에 굳이 줄을 긋고 ‘동거 중’이라 썼다. 대놓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재는 그에 대해서 더 얘기하지 않았다. 태경은 연재의 단아한 어깨선과 미끈한 턱선을 응시했다. 태경이 연재를 은숙 또래라 짐작한 건 목소리 때문이었지,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배는 젊어 보였다. 정말 그 또래라면. 이상하게 자꾸 은숙이 생각났다. 연재와 은숙은 판이했다. 외적인 부분은 물론, 그 외의 부분도 그랬다.


    엄마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했다면 저런 모습일 수 있었을까.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연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경을 리클라이너 소파로 이끌었다. 태경은 소파에 등을 길게 기대고 앉았다. 소파에선 어항이 더 가까이 보였다. 구피들이 아무렇게나 헤엄치고 있었다.


    갑자기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태경은 시선을 뗐다. 오디오 재생 버튼을 누른 연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경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연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이었다. 


    “이제부터 그 기억을 찾아볼 겁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저 위쪽의 검은 점을 바라보세요.”


    태경은 다시 눈을 떴다. 연재가 시키는 대로 위쪽의 검은 점을 바라보려 애썼다. 목뒤가 뻣뻣하게 당겼다.


    “목을 움직이지 말고 가능하면 눈만 움직여서 보세요. 계속해서 점을 바라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계속해서 점을 바라보세요.”


    망막 위에서 검은 점이 흐려졌다. 눈이 시렸다.


    “이제 그 점을 바라본 상태로 서서히 눈을 감을 겁니다. 눈을 완전히 감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계속 그 점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으세요.”


    태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니, 그건 태경이 감는다고 하기에는 기이했다. 눈이 감겼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네, 눈을 아예 감습니다.”


    눈이 완전히 감겼다.


    “이제 눈에서 힘이 빠져서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가 없을 겁니다. 눈을 뜨려고 해보세요.”


    잠깐 조용했다. 태경은 방금 전 눈을 뜨려고 애썼는지 떠올렸다. 이상할 정도로 아득했지만, 시도했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네, 잘했습니다. 이제 눈은 떠지지 않습니다.”


    태경의 눈두덩이 움찔 떨렸다.


    연재가 숫자를 세겠다고 말했다. 숫자를 하나씩 셀 때마다 지금보다 두 배씩 더 편안하게 되며, 다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태경은 몽롱한 의식 사이로 그 말을 신탁처럼 느꼈다.


    다섯. 넷. 셋. 둘. …… 하나.


    따뜻한 공기가 태경을 둘러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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