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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06. 2024

젖은 불고 편집은 안 끝나고


새벽 5시나 됐을까? 적막한 도로 위로 차를 겨우 올렸다.

간혹 지나는 택시의 헤드라이트만 보일 뿐 온통 캄캄한 도로.

운전대를 잡을 기운조차 없었지만 젖이 불어 돌덩이가 된 가슴의 통증 때문에 몸은 곧추섰다.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모기업 사내방송 원고를 끝내고 들어가던 새벽.

분명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원고였고, 나는 어제 퇴근해 말랑말랑한 젖을 6개월 된 둘째에게 먹이며 평화롭게 옹알이를 듣고 있어야 했다.

기업사내방송 작가는 그렇게 불안과 긴장감 없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공중파를 포기하고 선택한 일이었다.

덕분에 출근을 하면서 모유 수유도 가능했었다.

출근과 동시에 젖을 끊으려 했지만, ‘4시간마다 돌던 젖을, 시간을 벌려 퇴근 시간에 몇 번 먹이다 보면 거짓말같이 딱 그때 젖이 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고, 놀라울 만큼 인체는 신비로웠다.

출근 때 젖을 먹이고, 낮에 화장실에서 젖을 조금 짜내 버리고 나면 퇴근 때까진 무사했으니 말이다. 당시 대기업엔 여직원들을 위해 유축기와 모유 보관 냉장고도 있다 했지만 여의도 열악한 프로덕션에 그런 복지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퇴근 시간에 퇴근만 하면 되었고, 기업방송 일은 비교적 그게 가능했다.    

  


Y피디와 꼬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세상 인간적인 Y피디와 나는 수다도 자주 떨고, 인생사 고민도 함께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인격이 두 개라도 되는 양 일만 하면 딴사람이 되는 유형이었다. Y피디와는 일은 절대 안 한다는 작가, 아예 얼굴도 안 본다는 작가, 나는 그 중 ‘합을 잘 맞춰 일은 한다’는 작가였다. 프로그램 완성도를 위한 히스테리 정도는 참아낼 수 있었고, 뭣보다 나는 당시 생계형 작가였었기에.     

 

살다 보면 느닷없이 모든 게 꼬여버리는 요상한 날들을 종종 만난다.

그날은 촬영부터 편집, 원고, 컨디션까지도 모두 최악의 조합인 날이었다. 촬영 여건이 협조적이지 않아 촬영본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쓸 수 있는 컷들을 고르는 시간은 계속 늘어졌다.

퇴근 시간을 넘기자 점점 딱딱해져 오는 가슴 때문에 나 역시 말투에 신경질이 묻어났고, 자정을 넘기면서 우리는 피차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원고에 꼭 담으라고 전달받은 내용이 있으니까, 그냥 중복된 컷이라도 길이대로 붙이죠...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똑같은 컷을 몇 분 사이에 또 붙이는 게...

작가님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닙니까? 촬영본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야죠”


‘날로’란 말에 Y도 아차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뱉은 뒤였다.

“날로 먹으려고 새벽 1시까지 일해요? 그림을 좀 충분히 찍어왔어야죠”

나도 순간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구성작가가 뭡니까? 없는 그림으로도 잘 구성을 하는 게 작가지.

있는 거 쭉 붙이면 누가 못합니까?”     

그의 특기였다. 그놈의 ‘구성작가가 뭡니까 타령’


이쯤 되면 피디, 작가의 원색적인 설전이 시작된다.

‘잘 붙여야지’와 ‘잘 써야지’의 인과관계를 규정할 수 없는 논쟁.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피디와 작가의 신경전은 데드라인을 앞두고는 한마음이 된다.

‘방송 펑크는 낼 수 없다’는 명확한 합의점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 5시. 결국 서로를 할퀴고 난 뒤, 덩그러니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차에 몸을 실었다.


말은 생계형 작가라며 씩씩한 척하고 다녔지만, 사실 둘째까지 낳고 일을 하려니 머릿속은 24시간 아이들의 스케줄과 내 스케줄, 집안일 처리로 돌아가고,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늘 1.5배속쯤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일을 그만두면 우린 순식간에 가난해질까?

돌아오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버텨야 하는 마지노선일까?’

답을 찾고 싶어 질문을 해대는 사이 돌덩이 가슴은 아프다 못해 수유패드를 뚫고 젖이 새고 있었다.      


40여분만에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운전도 주차도 최대 난제였다. 한 번은 차로 출근을 하려다 도로의 버스들이 무서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차를 놓고 나간 간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해가 뜨려는지 아주 조금 푸르스름 밝아졌다. 그래도 밝으니 다행이다 싶은 순간, 웬걸 우리 동 앞 양쪽으로 불법 주차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 두 차 사이를 지나갈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서질 않아 내려서 보고 조금 앞으로 움직이고, 또 내려서 보고 조금 앞으로 움직이고... 내 티셔츠 앞은 젖이 흘러 이미 반은 젖었고, 남편은 자느라 전화를 받지 않는 상황. 내렸다, 운전했다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남편과 연락이 닿았다. ‘이것도 못 지나가냐’ 며 잠이 덜 깨 투덜대는 남편을 잡도리할 기운도 없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자는 아이에게 억지로 젖을 물렸다. 상체가 다 굳어져 버릴 거 같은 통증을 순식간에 해소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다행히 둘째는 분유가 안 맞았던지 젖을 힘대로 빨기 시작했다. 그제야 긴박한 격전을 끝낸 내 모습이 화장대 거울로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다 먹어버린 거뭇한 화장은 덕지덕지 남았고, 마치 뜯긴 거 같이 헝클어진 머리에, 가슴을 다 드러낸 몰골...

깊은 탄식을 타고 ‘이제 그만두자’ 란 말이 토해져 나왔다.    

 

그렇게 더이상은 견디지 못할 바닥을 보고서도 결국 나는 그만두지 못했다.

진짜 생계형이라 그랬는지, 오히려 나의 맷집이 더 강해졌던 것인지 정확히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그 후로도 생각만 해도 설움이 북받치는 날들은 수없이 많았던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이들이 훌쩍 다 크고 나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던 나는 한결같이 ‘그 숱한 날들을 버티지 말았어야 했다’고 확신했었다. 그때의 미련함들이 쌓이고 억눌려 내 마음이 이토록 병들었노라 단정지으며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런데 요즘, 새삼 ‘그 후회는 정당한가’,  ‘버티지 않았다면 과연 행복했는가’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아마 매 순간의 나는 답답하리만치 신중하게 한 걸음씩 옮겼을테고, 언제나 적정선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회상하니 지리멸렬한 길에 홀로 서서 어렵게 해냈을 모든 선택을 ‘후회’로 매도해버리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고군분투했을 나에게 조금은 다정하게 그때의 마음들을 물어주고 싶어졌다.

그 시간들을 홀로 버텨낸 나에게 잘못된 선택의 책임까지 추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치열한 걸음들이 모여 지금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여전히 선택은 어렵다.

모유 수유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고민들이 매일 쉴새 없이 고개를 쳐든다.

일에 치여 사춘기 아들들과 관계를 망친 것 같을 때, 훌륭히 엄마 역할을 소화해낸 듯한 엄마들 옆에서 내 커리어가 오히려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다양한 상황의 엄마들과 관계 안에서 홀로 섬처럼 여겨지는 순간...

내가 하는 선택들이 맞는지 매번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이제는, 자책과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해본다.

어디까지 가야하고 어디서 멈춰서야 할지 여전히 확신은 없지만, 몇 년 후에 또 지금의 선택이 어떻게 회고될지 모르지만, 오늘의 나와 오늘 내가 먹은 마음을 믿어보는 쪽으로. 그렇게 또 발을 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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