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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Jan 11. 2024

희비를 안겨 준 탈모 클리닉

2024년 새해다. 평소 새해보다 다섯 배 정도 더 비장한 1월의 세 번째 아침이다. 오늘 12시까지 가야 할 장소를 떠올리니 절로 분주해진다. 외출 준비를 일찌감치 마지고 식탁 의자에 앉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벽시계가 11시를 가리키자 깊은숨을 내쉬며 집을 나섰다. 거리는 어젯밤 내린 눈으로 여직 곱게 덮여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꽃 가루를 보고 있노라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38번을 타고 구월동으로 향해 갔다. 버스를 갈아타고 구월동 롯데백화점 역에서 내렸다. 뽀드득뽀드득.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약속된 장소가 있는 건물을 헤매다가 8층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띠링띠링. 눈 내린 거리처럼 깔끔한 모노톤으로 통일된 클리닉 센터에 들어서자 밝은 목소리로 맞이해 주셨다.

"어서 오세요!"

반겨주시던 직원 중 한 분이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안내해 주셨다. 전시된 헤어 제품을 둘러보다가 자리에 낮았다. 직원분은 내게 따뜻한 차 한잔내어주었다. 

"12시에 예약하신 최리나 님 맞으시죠?"

"네."

"상담 전에 사전 설문이 있거든요. 여기 종이 차트에 나온 질문지 읽어보시고 해당하는 곳에 체크 표시 해주시면 돼요. 상담하실 때 필요한 자료라서요."

직원분은 커다란 큐빅이 박힌 은색 볼펜과 사전 상담표를 내게 주시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나는 차가워진 몸을 뜨끈한 재스민 차로 녹이며, 차트 문항을 꼼꼼히 읽으며 요목조목 답변을 체크해 나갔다. 잠시 후, 차트작성을 마치고, 상담실로 안내받았다. 상담실 문을 열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 분이 정돈된 책상 앞에 앉아계셨다. 그녀는 백도화지 같은 얼굴에 커다란 눈,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리나 님, 어서 오세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성(姓)을 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준 그녀는 탈모 클리닉 원장님이시다. 입고 있는 플라워 패턴 블라우스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로  반겨준 그는 무엇이 고민이냐고 물으셨다.


"음... 제가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 지 한 5개월 됐어요. 미루고 미루다가 걱정돼서 와봤어요."


이곳에 찾아오기까지, 나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머리털 빠짐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출산 후 증상처럼 말이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럴 수 있어, 일이 많으니 그럴 수 있지.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런 걸 거야.

그때마다 머리가 빠지는 원인 진단을 스스로 내리고 일상에서 결핍을 찾았다. 그리고 그 결핍을 채워나갔다.

결핍된 부분을 메꾸면 비어 가는 머리통도 파릇파릇한 새 머리카락으로 채워질 거라 믿었다.  


하나, 두어 전부터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쓸어내리면 손아귀에 머리카락 여러 개가 빠져있고, 바로 반대편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려도 머리카락이 여러 빠지기를 반복했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머리 전체를 감쌀 때 느껴지는 부피감도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부풀었던 반쪽이 줄어든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려면 전보다 여러 번 휘감아야 비로소 짱짱하게 묶였다. 엄마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도 전체 머리숱이 단숨에 잡혔다. 매일 점검하는 방바닥 모니터링에서도 여전히 긴 검정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우리 집에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나뿐이라서 점검하기는 수월하다.


이런 상태로 막연히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탈모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몇 달을 지냈다. 식적으로 아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2024년 1월 1일을 두 시간 앞둔 시각, 샤워한 후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마음을 굳세게 먹었다. 그래, 문제에 직면하자! 곧장 거실로 나와 노트북을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탈모클리닉'이라는 다섯 자를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적고 인근 지역 정보를 클릭했다.


'OOO두피 클리닉 센터'  5.6km

'OO 두피 클리닉 센터' 4.5km

'OOOO두피 케어 전문샵' 3.7km


사진으로 보기에도 내부가 깔끔하고 전문화된 의료 기기를 갖췄다는 OOO 두피 클리닉 센터가 마음에 쏙 들었다. 1월 5일에 방문하기로 온라인 예약을 완료했다. 제야의 종을 치기 사십오 분 전에. 망설이던 일을 실행으로 옮기니 속이 후련하고 괜스레 가슴이 벅차올랐다. 탈모클리닉을 가겠다는 다짐은 내게 있어 다른 새해 시작이다.  

 



이렇게 탈모클리닉을 찾아오기까지 망설임과 받아들임이라는 긴 쌍벽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탈모클리닉 원장님 앞에 앉아 있기까지 결국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탈모가 아닐 거라는, 내 머리카락에 대한 확신을 내려놓아야 했으니울상 지으며 늘어놓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원장님께서는 요즘 탈모가 너무 많다고, 특히 4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여성에게 탈모가 현저히 많이 일어나는 게 현대 사회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조금 위로가 되면서도, 더 서글퍼졌다. 

'출산하고 애 키우면서 일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젠 머리카락까지 빠지네...' 억울했다. 멍하니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그럼 리나 님, 검사를 한 번 해볼까요?"


기다리고 염려되는 탈모 검사가 시작됐다. 그는 첨단 두피 검사 디지털 기기를 내게 가져와 내 머리통에 대고 머리카락을 몇 올씩 이리저리 넘겨가며 이 잡듯 검사하셨다.

"아우, 음... 아이고."

머리카락을 이리 치우시고, 저리 치우시며 검사하는 선생님이 알 수 없는 탄식이 쏟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멀뚱하니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선생님의 탄식을 듣고 있자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 해보는 두피 검사에 어색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벌거벗긴 것만 같았다. 평소에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머리를 감고 살아왔다. 그러니 내 두피 상태가 어떠한지 알 턱이 없었다. 그간의 내 머리 감는 패턴과 방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갔다. 대충 감고 급하게 대강 머리를 말려 왔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두피에게 지독하리만치 무심했다. 어려서부터 피부에는 그렇게도 관심이 많으면서 두피는 다른 사람 것인 양 대하며 살았다. 짐짓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바지런히 내 머리통을 촬영하시던 선생님께서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앉으셨다. 짧침묵 방 안을 메운 공기마저 가라앉는 듯했다. 아무 말 없이 컴퓨터 마우스를 붙잡고 검사 결과를 클릭하며 자료를 송출하는 선생님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날쌔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침을 꼴깍 삼켰다. 스크린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원장님의 검은 눈망울이 진해지자, 내 눈빛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괜히 왔나? 검사 한 번 하려고 한 건데... 지금이라도 나갈까?' 

원장님 눈치를 살피며 갈등하던 내게 선생님은 커다란 스크린을 돌려 보여주시며 입을 여셨다.

"리나 님"

진료실을 들어섰을 때 밝고 상냥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묵중한 호명이 날아왔다.

"네."  

"탈모 중기십니다."




"뭐라고요?!"

탈모 중기십니다, 탈모 중기... 탈모...  짧은 한 문장이 머리통을 댕댕 때려댔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그저 '탈모'라는 세계에 발 한 짝 살포시 적신 거겠지 싶었다. 한데 그냥 탈모도 아니고 탈모 중기라니출산 후 잠시 생기는 탈모처럼 일시적 현상일 거라는 자기 믿음이 꽤나 컸나 보다. 탈모 초기도 아니고 '중기'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저기... 음... 탈모 중기라고 하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숨을 고르며 최대한 침작하게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상황을 알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내 두피 사진을 하나하나 집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자, 여기 보이시죠? 각질들. 각질이 꽤 많아요. 이 각질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생기거든요. 환절기도 한몫을 하고요. 두피도 피부예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얼굴이나 목처럼 두피를 세심히 관리하지 않잖아요."


학창 시절 수업 시간 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으로 검사 차트와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의 말에 온 힘을 다해 열중했다.


"겹겹이 쌓인 각질이나 노폐물이 모공을 막으면 두피도 숨을 쉴 수 없어요. 물론 매일 머리를 감지만 아주 꼼꼼하게 감지 않는 이상 모든 노폐물이 다 씻기진 않으니까요. 모공이 막히면 두피도 숨을 쉴 수 없고, 머리카락에서 뿌리까지 영향을 전달하지 못해요. 자연히 건강을 잃겠죠. 그러면 뿌리와 머리카락도 얇아지고, 힘을 잃어 머리카락이 잘 빠지게 되는 거죠. 자, 여기 구멍 보이시나요?"


구구절절 옳은 말씀에 경청하던 나는 화면에서 집어 주시는 내 두피 일부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빈 구멍이었다. 머리카락이 빠져 외로이 있는 두피 모공. 그런 빈 모공이 여기에, 또 저기에서도 보였다.

황망한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며 '저게 그건(탈모된 모공) 가요?'라는 눈빛을 던졌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선생님께서는 탈모의 원인이 매우 다양하다고 하시며, 그 대표 원인으로는 주로 카페인 다량 섭취, 수면 부족, 영양 섭취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잦은 머리 염색과 과다한 스트레스를 손꼽으셨다. 




다른 원인은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으나, '염색'이 탈모의 커다란 원인 중에 하나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염색약이 꽤 독해요.  그런데 우리가 흰머리가 나면서, 삼사십 대부터는 정기적으로 뿌리 염색이나 염색을 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염색약이 독해서 자주 하면 두피까지 물들고, 피부에 스며든 염색약으로 인해 세포가 죽어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답변과 명쾌한 해설에 무릎을 쳤다. 원장님께서는 다시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 거뭇거뭇한 반점 같은 거 보이시나요? 여기, 그리고 여기." 

내 두피에 있는 검정 얼룩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염색약 잔여물이란다. 

"이게 바로 머리 염색약이 물든 거랍니다. 머리를 감아도 다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거든요. 이런 염색약이 스트레스만큼이나 가장 심각한 탈모의 직접적 요인이에요."


여기저기 물들어 있는 염색약 잔여물 샷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내게 선생님은 따뜻한 말을 건넸다.

"지금이라도 관리를 받으시면 나아지실 수 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다시 상냥해진 원장님은 절망에 빠진 내 앞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두꺼운 갈색 커버의 파일을 들이밀었다.

파일을 열자, 프로그램과 가격표가 나열되어 있었다.


- 관리 프로그램, 가격표 -

기본 68,000원   OOO +OO+OOOO  관리

트러블성 두피 관리 75,000원  OOO+OO+스케일러+OOOO 관리

지루성 두피 관리 85,000원  OOO+OO+ 스케일러+ 마사지+ OOOO 관리

VIP 관리 120,000원 풀패키지 OOO+OO+ 스케일러+ 마사지+ 아쿠아워터 관리+ OOOO 관리


탈모 판정에서 허덕이느라 넋을 잃었던 내가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관리하면 전처럼 풍성한 머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원장님 말씀에 파일을 훑어보며 정신을 추슬렀다. 


"오늘 상담 감사해요. 먼저 제 상태를 알고 싶어서 무료진단 검사를 예약했었고요, 상담 결과를 남편에게 전하고 나서 결정해야 할 거 같아요."

"금액이 부담되시나요? 워낙 고가 기기와 제품을 이용해서요. 호호. 너무 부담되시면 신년 프로모션도 있어요. 12만 원짜리 VIP 관리를 1회당 6만 원에 받으실 수 있는 신년 프로모션이에요. 때마침 오셨으니 그거라도 해보시죠. 서둘러 손쓰셔야 하는데..."


정공법으로 다시 권유하는 선생님을 향해 나도 다시 방패를 세워 들었다.

"아, 근데 저희 부부가 돈을 쓰기 전에 서로 금액이 든 작든 의논하고 결정해서요. 또, 제가 정말 탈모 중기라고는 예상을 못해서 지금 너무 당황스러워요. 남편과 의논 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급하다는 걸 누구보다 느낀다. 그럼에도 차분히 돌다리를 두드리고 싶다. 포기를 모르시는 듯한 원장선생님의 치료 권유 영업이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시간을 달라는 내게 원장님께서 쐐기를 박는 필살기를 휘두르셨다.


간암이 왜 무서운지 아시나요?




탈모 중기 판정으로 한 방 크게 맞아서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암이라니. 간암은 또 웬 말인가.  

"간암은 간이 아프다 싶었을 때 병원 가면 '말기'거든요. 그땐 손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미처 모르고 살아가면서 병 속도가 빠르게 진행된답니다.  탈모는 바로 간암과 같이 대해야 해요.  지금은 탈모 중기 이시지만, 이대로 가버리시면 다음에는 더 악화되어 있을 겁니다."


원장님은 단호했다. 예리한 눈빛으로 간암과 탈모를 비유한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겁이 덜컥 났다. 원장님의 말씀이 허황된 이야기 같지 않았다. 바로 지금 내가 '탈모 중기'라는 오늘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언제 이걸 예상이나 했단 말인가.


간암과 탈모 중기. 찰떡같은 비유에 다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탈모는 불현듯 다가와 급속히 진행된다는 그의 말에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내쉬며,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급한 상황이라는 거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지금은 갑작스러워서 가격이 좀 부담돼요. 생각이 필요해요. 죄송하지만, 혹시 그사이 집에서도 혼자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장선생님께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하셨다.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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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브런치북] 스치듯 탈모 : 탈모 탈피 백서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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