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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Feb 13. 2019

꿈꾸던 집이 주는 따스함

리스본의 에어비앤비



에어비앤비 주인이 에어비앤비 앱 내의 쪽지로 보내준 장문의 글 속에는 이 집을 어떻게 들어와야 하는지 적혀있다. 구글맵이 가르쳐 준대로 플랫 건물을 찾았다. 하루 동안 리스본을 걸으면서 높다랗고 알록달록한 다양한 문을 보며 평균적으로 3-4층 정도 되는 건물들을 하나씩 올려다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 집엔 누가 살까, 이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저 초록색 대문의 집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 집에 사는 사람인 양 당분간 이곳을 들락날락하게 될 것에 설렌다. 들어가자마자 높고 이국적인 건물의 분위기가 좋다.


에어비앤비 주인이 알려준 대로 2층으로 향한다. 입구에 노란 박스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1층이 0층으로 시작되는지 몰랐다. 내가 계속 헤맸던 곳은 2층이 아니라 1층이었던 것이다. 계속 지나다니는 할머니에게 영어로 소용없는 질문을 한다. 캐리어를 들고 언덕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없는 두툼한 나무 계단을 오른 데다 2층이 아닌 1층에서 헤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앱을 켜서 주인에게 전화하기를 누른다. 30분 정도 통화가 가능한 심카드로 사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에어비앤비 주인은 10분 내로 와서 알려주겠다고 했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고 상냥한 아기 엄마였다. 설명을 듣고 보니 에어비앤비 쪽지로 온 이 집에 들어오는 설명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괜히 헤맨 것이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놀랐다. 가격이 저렴해서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넓고 좋았다. 방을 밝혀주는 따스한 조명들, 넓은 침대, 벽면의 그림들, 가구들, 특히 소파와 테이블까지 있다니 기대 이상이었다. 주인이 올려 놓은 사진은 지나치게 못찍은 사진이었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한 병 가득 물이 채워져 있었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물컵과는 다른 유럽식 디자인의 물컵도 놓여있었다. 옷을 가득 걸 수 있는 행거도 너무 좋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따뜻한 나라여서 그런지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약간 추웠다. 자기 위해 불을 끄고 누우면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이 어둠과 함께 느껴져서 더욱 싸늘함이 돌았다.


닫혀 있는 발코니 문 사이로 햇살이 삐져 들어와 열어 달라고 안달 중이다. 나 역시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했다.


발코니를 열면 보이는 풍경



모든 색깔을 망라한 부드러운 색조가 대기 윗부분의 여러 층위를 메우고 상공에 널리 퍼진 슬픔 속을 자취 없이 떠다닌다.

고요해져 가는 도시의 소음 위에 거대한 고요가 머물고 있다. 깊고 조용한 한숨과 함께 모든 것들이 색깔과 소리 너머에서 숨 쉬고 있다.

저녁이 이른 밤으로 바뀌기 전, 스러지는 햇빛이 던지는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도시가 변해가는 모습 사이로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좋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나는 걷는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해가 떨어질 무렵 도시는 어스름해지고 내가 캐리어를 들고 끙끙대며 올라왔던 길은 다른 분위기가 된다. 발코니를 열고 한동안 포르투갈의 집 한가운데에 있다는 행복감을 느껴본다. 일상이 아니기에 너무나 새롭고 적응이 되지 않는다.


행복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에어비앤비 주인이 추천해 준 목록 중 숙소 근처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굽이굽이 언덕 높이 전망대로 향하는 길이 숨어 있다. 관광지로 유명한 전망대가 아니라 이 근방에 사는 주민들이 오르는 곳 같아 보여 더욱 좋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길의 돌바닥을 걸어 올라간다. 숨이 차다. 해가 진다는 5시 반이 되기 전이라 사람들이 일몰을 보기 위해 몰려 있다. 와인과 와인 잔을 가져와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분위기가 좋다.


일몰을 보고 언덕길을 내려와 숙소 주변을 걷기 시작한다. 밤거리는 이미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다. 밤공기가 기분 좋게 상쾌하다. 약간 쌀쌀하지만 춥진 않다. 저녁은 왠지 터키 케밥이 먹고 싶다. 룬드에서 아꼬랑 길에서 손 시린데 먹던 맛있는 케밥이 생각났다. 구글맵을 열어 케밥을 쳐본다. 4분 내로 큰길로 나가면 터키 식당이 있다고 한다. 큰길로 나가 본다. 어머 이 나라에도 군밤을 파네. 여성 군밤 장수가 군밤을 팔고 있다.


식탁에서 먹고 싶어 포장해온 케밥은 품질이 좋지 않다. 못쓰는 닭의 부위를 모아 놓은 것을 뿌려준 것 같다. 먹을 수 없는 지경의 맛이다. 웬만하면 다 먹는 편인데 두 입 먹고 버렸다. 길에서 사 먹은 케밥을 실패한 적이 없는데 많이 아쉽다. 그때의 아쉬움을 떠올리며 한국에 돌아와 다시 케밥을 사 먹었다.


집 즐기기. 책 읽으며 뒹굴뒹굴, 발코니에서 햇살 받기.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읽기
내가 프랑스의 고풍스러운 아파트를 한 달 빌려서 산다면? 아니면 오래된 호텔에서 지낸다면 어떨까.

상상 속의 나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 비를 맞으며 걷다가 편의점에 들려 와인 한 병을 산다. 와인을 알지 못하는 나는 그냥 대충 가격에 맞춰서 검붉은색 와인을 산다.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어 골목은 어둑하다. 나는 높고 단단한 아름다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융단 같은 소재의 검붉은색 바닥과, 높은 천장을 가진, 커다란 침대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적당히 아담한 방을 상상한다. 몸이 피곤한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높은 검정색 하이힐을 팽개치며 벗는다. 싸구려 와인잔을 가져와 낮은 탁자에 놓고 바닥에 그대로 앉아 와인잔에 와인을 콸콸콸 따른다. 영화에서 나왔던 와인병이 잔에 닿는 소리, 따르는 소리가 인상적이었나 보다. 검은 스타킹의 올이 융단에 부대끼는대도 그냥 마신다. 와인 병째로 마시기 시작한다. 입술도 검붉어진다. 머리는 비를 맞아 뒤엉켜있고 자주색을 바른 눈은 번져있다. 코트를 아직도 입은 채로 바닥에 그냥 대자로 눕는다.
-2018년 4월 6일에 쓴 글.


작년 비 오는 봄날,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의 상상을 담은 글이다. 돌이켜 다시 이 글을 읽어보니 리스본에서 지낸 에어비앤비 집은 내가 상상 속에서 머물고 싶던 집과 꽤 흡사했다.

이 집이 주는 분위기는 너무나 따스했다. 프랑스 카우치 서핑 집에서 애먹은 딱딱한 유럽식 문과도 비슷했다. 딱딱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굉장히 클래식하게 느껴진다. 문의 열쇠도 좋다. 식탁 위는 내 물건들로 어지럽혀 있다. 집이 주는 따스함을 충분히 즐긴다.  


문은 요령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리 요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안 열린다. 열쇠를 깊게 넣지 말고 내쪽으로 약간 끄집어내 돌리는 것이 포인트다. 문이 안 열려 환장하면서도 프랑스의 추억이 떠올라 기분 좋은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돌아가고 싶던 장소인 유럽에 다시 왔으며 크고 높은 단단한 문을 가진 플랫에 살고 싶다는 평소의 열망이 실현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서서히 일상화되어 간다.


유럽 집의 딱딱한 문. 요령이 생기기 전까지는 안 열려서 환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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