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온 가족이 함께 극장에 가서 <위키드>를 보았다. 녹색 마녀가 나와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멋진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나서 물리치는 내용일까라고 잠시 상상했다. 사실 여기까지가 내 상상력의 한계였던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작가는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구상하였을까 내내 감탄했다.
<위키드>의 주인공은 2명이었는데, '엘파바'와 '글린다'이다. 엘파바는 초록 피부를 가져 놀림을 당하지만, 놀라운 초능력 덕분에 오즈의 마법사로부터 선택을 받는다. 글린다는 모두가 좋아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금발 미녀이지만, 재능이 없기 때문에 마법 수업을 듣지 못한다.
엘파바가 결핍을 지닌 주인공이기 때문에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파바에게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엘파바를 보면서 공감을 했다. 부유하고 예쁘고 인기 많은 글린다가 부러웠다. 질투가 나니 그녀가 이기적이고 미워보였다. 그런데 상대방을 부러워한 것은 엘파바 뿐만이 아니었다. 글린다 또한 엘파바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글린다는 엘파바의 순수함과 용기에 끌리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이도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진실을 위해 함께 싸우는 동료가 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왠지 우리 부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부러워했다. 나는 스스로를 엘파바 같다고 여겼고, 아내를 글린다처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처럼 역기능가정 출신도 아니었고, 어딜 가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다재다능해서 인기도 많아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예뻐보였다. 그런데 어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나를 부러워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린다가 엘파바를 부러워했듯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나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글린다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순간 나는 반성했다. 나는 지금까지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므로 서로 질투 같은 것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부라면 당연히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엘파바와 글린다를 보면서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궁금했다. 우리 부부도 글린다와 엘파바처럼 함께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세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로, 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각자의 타고난 성격과 장점과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질투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혼자서 하는 활동을 좋아하고,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잘 하고, 힘들고 지루한 상황을 견뎌내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반대로 아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좋아하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행정업무를 잘 하고, 남들을 잘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약국을 오픈할 때도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나에게 약사면허증이 있었지만, 나는 약국에서 자리를 지키고 약을 조제하고, 상담판매만 할 줄 알았지 어떻게 개국을 준비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내에게 그런 지혜와 센스가 있었다. 아내는 정보를 검색해서 준비해야 할 사항을 시기별, 종류별, 금액별로 엑셀파일로 정리하고, 직접 설계도면을 그렸다. 뒤이어 약국자리를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지시하고, 제약회사에 전화를 걸어 영업사원과 약속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내가 없었다면 개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째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아내를 응원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아내가 집안일을 하고 자녀들을 키우느라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가장이고 아내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약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순간순간 나는 글린다가 되어 지위와 인정을 누렸고, 그녀는 엘파바가 되어 조용히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올해도 아내는 약국 업무와 약사 브랜딩을 매주 성실하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타인을 돕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배움을 놓지 않고 있었고, 꾸준히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지갑, 옷, 가방을 만들어 가족과 지인에게 선물했고, 몇 십년만에 피아노를 배워 교회에서 반주를 했고, 레몬마들렌, 마카롱, 빵, 케이크를 부지런히 구워 런클럽 식구들과 함께 나눠먹었다. 이제는 필라테스를 열심히 배우며 꿈을 키우고 있다.
내가 십수년간 지켜본 아내는 참 선한 사람이다. 항상 진실된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돌아보고, 약하고 아픈 자의 필요를 채우려 애쓴다. 나는 엘파바의 진실을 향한 신념과 실천하는 용기를 보며 아내를 떠올렸다. 글린다가 "Because I knew you, I have been changed for good."(당신과 함께 한 시간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나도 아내에게 똑같이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아내의 재능이 꽃피우면 반드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리라 확신한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남편으로서 그녀를 칭찬하고,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셋째로, 나는 아내와 공통 목표를 세우고 함께 도전하기로 했다. 글린다와 엘파바는 "Together we're unlimited. Together we'll be the greatest team there's ever been."이라고 말하며 무거운 중력을 거스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우리 부부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한 팀이 되어 함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사랑은 더욱더 깊어지고 우리가 함께 빛날 것이라 믿는다.
우리 부부는 2024년이 지나가기 전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사실 우리 부부는 20킬로미터는 단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15킬로미터, 나는 10킬로미터 정도가 한계였다.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는데, 나와 달리 담대하게 '서울한강마라톤대회'에 도전장을 내미는 아내의 용기가 멋있어보였다. 조금 질투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그 목표를 이루길 온 마음으로 바랐다. 일년간 고생한 아내에게 큰 위로와 선물이 될 것이라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렵지만 힘이 되고자 함께 하프 마라톤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두 명분의 마라톤 대회 참가비를 납부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난 토요일 아침 우리 부부는 연습차 한강변을 달렸다. 아내는 오늘 20킬로미터를 달릴 거라고 말했으나, 나는 그게 가능하리라 믿기지 않았다. 방화대교부터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양화대교까지 10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나는 아내에게 농담으로 이제 택시를 부를까라고 말했다. 나는 종아리가 아파 다리를 높게 들지 못했고 결국 바닥에 걸려 넘어졌다. 아내는 괜찮아?라고 나를 걱정해주는 동시에 내 옆을 지키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진 안경을 주워들고 다시 일어섰다. 아내는 거침없이 계속 달렸고, 나는 아내의 뒤를 따랐다. 16킬로미터가 넘어가자 아내도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18킬로미터가 되자 아내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 모습을 보니 어떻게든 아내와 함께 완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내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 앞으로 치고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2시간 13분만에 2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웃음진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그 순간, 나는 아내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임을 깨달았다. 질투가 응원으로, 갈등이 사랑으로 변한 보석같은 시간이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너무 다르지만, 오히려 그 다름이 약점이 아니라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장점이 되어 20킬로미터라는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왠지 이 20킬로미터는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우리 부부는 함께 싸우고 함께 이겨내고 함께 빛날 것이다.
If we work in tandem
There's no fight we cannot win
Just you and I, defying gravity
With you and I defying gravity
They'll never bring us down!
- <위키드> 중에서